[공감]사과는 바나나가 아니다

“여러분이 빈말로 내 꿈과 어린 시절을 빼앗아갔어요.” 스웨덴의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뉴욕에서 열린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분노를 터뜨렸던 지난 9월23일, 구티에레스 유엔 사무총장에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발신인은 이른바 ‘유럽기후선언’을 발표한 23개국 506명의 ‘과학자들’. 이들의 요구는 명료했다. 기후위기는 없으니 기후대책을 과학적이고 경제적으로 수정하라는 것이었다. 기후변화는 최근의 빙하기가 1850년에 끝나 수반되는 자연현상이며, 온난화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느릴 것이고, 온실가스의 영향이 과장됐다는 주장이었다.

유럽의 팩트 체커들은 즉각 연대 검증을 시작했다. ‘선언’의 명부에 올라있는 사람들이 정말 서명을 했는지, 그들의 전문영역이 기후변화와 관련이 있는지 등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기후변화에 관한 주장들의 사실성을 검증하는 과학자들의 네트워크인 ‘기후 피드백(climate feedback)’ 등이 서명한 과학자들의 신원을 200여명까지 확인한 결과, 대기과학이나 기후학으로 논문을 쓴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200명이 넘는 ‘과학자’는 기후연구와 거리가 먼 수학교수, 경제학자, 의사, 기업 간부, 이익단체 구성원이었다. 다수는 화석연료 개발과 직간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있는 지질학자와 엔지니어들이었다.

단단한 객관적 진실을 다루는 것으로 여겨지는 과학의 영역에서 이렇게 대안 진실(alternative truth)을 주장하는 사례는 이제 드물지 않다.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다큐멘터리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원제 Behind the curve)에는 지구가 평면이고 우리가 보는 하늘은 할리우드가 만든 거대한 세트라고 믿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2015년만 해도 ‘평평한 지구’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관련 자료가 5만건 정도였는데, 2018년에는 1940만개로 늘었다고 자랑했다. 관련 유튜브 영상만 100만개가 넘어 평생 보아도 다 못 본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기후위기가 없다’거나 ‘지구가 평평하다’는 의견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의견이 은근슬쩍 세를 몰아 사실의 자리를 넘보면 자세를 고쳐 이 주장들의 진위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 사진이 있고, 통계가 있다며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거나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조국 전 장관 자택 압수수색 때 조 전 장관의 전화를 받은 것은 남자검사였지만 수사팀의 여자검사가 전화를 받았다며 인터넷에 해당 검사의 인적사항이 나도는 가운데 욕설이 퍼부어졌던 것은 없는 사실이 만들어진 사례였다. 지지와 비판, 열광과 혐오가 들끓는 와중에 사실 따위는 부차적인 요소가 되어버리는 현상은 정치는 물론이고 과학, 젠더, 문화 등 사안을 막론하고 공통적이다.

뉴욕타임스의 서평 기자로 이름을 날리다 은퇴한 미치코 가쿠타니는 저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에서 양립하는 의견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는 중립적 태도가 터무니없는 주장에 길을 내어주는 거짓 등가성(false equivalence)을 만들어낸다고 경고한다. “인기 있는 것과 증명 가능한 것의 차이를 흐려서” 의견이 사실로 은근슬쩍 탈바꿈하면 사실이 무엇인지는 모호하게 되고 사람들은 사실 판단에 피로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지지자들이 후보 시절부터 거짓 주장을 펴면서도 이를 ‘대안적 진실’이라고 명명하자 CNN은 2017년 10월 자사 표어를 ‘사실 최우선(Facts First)’으로 바꿨다. 사과 한 알이 나오는 30초짜리 홍보 영상도 내놓았다. “이것은 사과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바나나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들이 계속 ‘바나나 바나나 바나나’라고 외치면 당신도 이게 바나나라고 믿기 시작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과입니다.”

홍보영상 아래 넣은 CNN의 메시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사실이 확립된 뒤에 의견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의견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사실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사과는 바나나가 아니고, 지구는 평평하지 않다. 사실은 아무리 사소해도 사실이다.

<정은령 언론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