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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공감]시간의 선물

opinionX 2020. 4. 1. 10:52

집에서 학교로 향하는 길목에 도넛 파는 가게가 하나 있다. 길모퉁이와 기차역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점이다. 근처에 다른 카페나 빵집이 없다보니 출근길에 종종 거기 들른다. 커피와 함께 도넛 두개를 포장해 하나로 아침요기를 하고 다른 하나는 오후 공강 시간에 간식으로 먹곤 한다. 여러 해 이어진 일상이라 계절별 신제품도 꿰고 있다. 초봄엔 딸기우유크림 들어간 네모난 도넛, 늦가을에는 밤잼 넣은 동그란 도넛, 한겨울이 되면 초코쿠키 얹은 링도넛, 이런 식으로.

작년 이맘때까지 거기서 일했던 분은 내 또래로 짐작되는 여자점원이었다. 바쁜 시간대엔 아르바이트생과 함께였지만 아침엔 주로 그분 혼자 점포를 지켰다. 새침한 인상에 불필요한 말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내가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서는 걸 보면 주문하기 전에 늘 먹던 ‘샷 추가하고 물 적게 넣은 아메리카노’를 제조해주셨다. 

이 섬에서 맞이한 첫겨울에는 눈이 많이 왔다. 함박눈 쏟아지던 어느 아침, 커피를 내리던 그분이 갑자기 말을 건넸다. “오늘 미리 장 봐두세요.” 이제껏 커피와 도넛 이외의 대상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 없었기에 놀라서 “예?”하고 되묻자 “여기 겨울 처음 겪죠?” 하셨다. 이곳은 중산간 지대라 폭설 시 차가 다니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실제 그날 이후 사흘 밤낮으로 눈폭풍이 치더니 ‘길’과 ‘길 아닌 곳’의 경계가 무너졌다. 이듬해 겨울 다시 큰눈이 내린 날엔 보아하니 이번엔 길이 파묻힐 정도는 아니라 하셨고, 하룻밤 지나자 과연 차들이 쌩쌩 다녔다. 그렇게 난 요긴한 기상 정보를 ‘네이버 날씨’ 앱 아닌 단골 도넛집에서 구했다. 고마움의 표시로 멀리서 사온 레몬케이크 같은 걸 잘라 갖다드리면 “빵 파는 사람한테 빵 주네?”하고 웃으셨다.

그렇게 차츰 가까워지며 마음에 걸리는 게 생겼다. 결제 후 카드를 돌려줄 때 그분은 항상 테이블 위에 두셨는데, 그때마다 예전에 친구한테 들은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친구는 카운터에서 결제할 때 카드나 현금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는 것은 무례함의 발로라 했다. 돈은 손에서 손으로 직접 건네는 게 상대에 대한 예의라는 것이었다. 그때껏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나는 충격을 받았고, 그 후 계산대에 서면 의식적으로 ‘손에서 손으로’를 기억했다. 짐작건대 그분 역시 이제껏 그런 생각 못 해보셨을 텐데, 혹여나 일부 손님이 오해하면 어쩌지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친해졌다 해도 ‘손에서 손으로’가 예의라더라 전하는 건 무례한 참견 같았다. 더욱이 그게 보편화된 에티켓인지 확신도 없었기에 말하지 않는 편이 옳을 듯했다. 아무튼 나는 계속 카드를 상대의 손으로 건넸고, 상대는 계산 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턴가 이에 대해 잊었다.

몇 계절 더 지나 봄이 되었다. 가게로 들어서자 그분이 “앞으론 정석대로 주문하셔야 해요. 샷 추가하고 물 적게 넣은 아메리카노” 하셨다. 그날이 본인의 마지막 근무일이라 했다. “3년 넘게 뵈어왔는데 아쉬워요.” 발끝을 보던 나는 다음 순간 퍼뜩 고개를 들었다. 계산 후 카드를 내미는 상대의 손끝이 그날은 테이블 위가 아닌 내 손 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게 뭐라고, 눈물이 핑 돌았다.

‘저 손님의 숨은 생각을 읽어내 마지막 만남에서 감동을 주자’고 의도한 건 아니었을 테다. 그건 아마 부지불식간에 우연히 나온 몸짓이었을 테고 어쩌면 그날의 사소한 ‘실수’였을지 모른다. 다만 그 우연성 안 어딘가엔 날마다 커피와 도넛 두개씩 사가는 고객이 손에서 손으로 뭔가 건넸던 3년간의 아침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말하자면 그건 시간이 준 선물이었다. 그러니 지속되는 관계 속에서 때론 상대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 말하는 대신, 당신의 길을 그대로 걸으며 시간의 선물에 신뢰를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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