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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봄꽃은 화려하게 만발했는데,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규제 철폐, 남북관계 등 사회적 난제와 정치적 의제를 둘러싸고 던져지는 ‘○○장사’ ‘○○기요틴’ 등의 언어들을 접하다보면 갑자기 추워진다. 불화(佛畵)에 등장하는 아수라가 떠오른다. 아수라는 천상계, 인간계 등 6계의 하나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이다. 상식과 지혜는 부족하고 이견과 갈등이 넘쳐난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람들의 대화와 집단 의사결정을 도와주는 전문영역으로 퍼실리테이션이라는 것이 있다. 잘 설계되고 구조화된 대화를 통해 갈등을 완화하고 공감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전문분야다. 갈등이 넘쳐나는 오늘의 현실을 퍼실리테이션의 눈으로 분석하면, 첫째 우리에게는 모두를 참여시키는 열린 대화의 장이 너무 부족하다.

대화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시냇물이 모여 거대한 의미의 강을 이루는 것이며, 대화의 목적은 더 큰 지혜를 창출하는 데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정파적 취향에 맞는 모임에 가고 인터넷을 통해 대화를 하면서도 반대 입장의 사람들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이것을 의학이나 심리학에서는 주의편향 또는 선택적 인지라고 한다. 이 병이 만연하고 있다. 지하철에 앉아서도 끊임없이 스마트폰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들여다보지만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광장에서의 단절이다. 특히 동종 그룹 내에 편중된 밀폐 대화는 사회적 의제에 대한 선택적 인지를 더욱 강화한다. 이렇게 되면 상대의 입장에서 사물을 볼 수 없고 상대의 기쁨이나 고통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공감할 수 없으니 경청도 할 수 없다.

둘째, 대화의 과정이 투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가진 것 없는 개인들이 권력 집단과 하나의 장에서 대화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적 지혜이다. 예를 들어, 정부가 대화의 당사자일 경우 스스로 중재자를 자처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대화를 끼워맞춘다는 의심을 사기 때문이다. 하나의 이해당사자로서 자신을 낮추고 숨겨진 의도 없이 단지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대화의 기본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간다. 온전한 대화의 문화를 재건하는 데 정부와 정치권이 앞장서야 하지 않겠는가?

셋째, 대화의 주제도 잘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언론 보도를 보면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화두들은 ‘누구 잘못이냐’ ‘누가 책임질 것이냐’ ‘어떻게 보·배상할 것이냐’로 요약된다. 이 질문들은 반드시 답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들이지만, 누군가를 겨냥하고 있는 그래서 누군가는 반드시 회피하게 되는 질문이다. 온전한 대화를 위해 우리가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상위의 화두는 ‘진실이 무엇인가’ ‘이 교훈을 토대로 어떻게 우리 사회를 안전하게 만들 것인가’ ‘어떻게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본질적이고 큰 질문을 중심에 놓고 앞의 질문들은 하위 단위로 자연스럽게 다루어 나가야 한다. 앞의 질문들이 부각되고 있는 데에는 일부 언론의 영향이 크다.

제2회 종교포럼 ‘종교를 걱정하는 불교도와 그리스도인의 대화-경계 너머, 지금 여기’가 최근 서울 화쟁아카데미에서 열렸다. (출처 : 경향DB)


넷째, 대화에 사용되는 단어와 개념들이 너무 거친 경우가 많다. 언어란 상처를 입히는 흉기도 되고 사람을 살리는 치유의 도구도 된다. 그래서 아름다운 시는 자아를 넘어 세상을 끌어안을 여유를 주고, 아름다운 기도는 내면으로부터 치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비어들은 멀리할 필요가 있다. 대화에 비어가 끼어들면 대화의 장이 망가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때부터는 ‘내가 얻는 것이 없어도 너만은 꼭 망가뜨릴 거야!’ 하는 마음이 들게 된다.

시대의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온전한 대화의 조건들을 건설해야 한다. 한 시인은 우리 사회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1960년대 말 이렇게 썼다. ‘… 하잘것없는 일로 지난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하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신좌섭 | 서울대 교수·의료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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