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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인가, 페이스북 친구들 사이에선 한 해가 끝나갈 무렵이면 ‘올해의 영화’ 다섯 가지나 ‘올해의 책’ 다섯 가지 같은 것을 꼽는 일이 연례행사처럼 치러진다. 한 번도 참여해본 적이 없다. 결정을 내릴 수 없어서다. 마음속으로 순서를 매겨보다가도 왜 이것은 들어가고, 저것은 빠져야 하는지 스스로 설득이 안된다. 대개는 목록 다섯 개를 채우지도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이 좋았는지를 고를 수 있을 만큼 풍성한 삶을 살았는데, 나는 그것도 못 채울 정도로 얄팍한 1년을 보냈나 싶어 쓸쓸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서열을 매기는 일은 관점을 드러낸다. ‘나만의 목록’이라며 책이나 영화, 노래를 골라 올리는 일도 사실은 “나는 어떤 취향의 사람이야”를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서열을 매기는 일은 권력행위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공표할 수 있는 주체에게는 힘이 실린다. 무엇보다도 서열을 매기는 일은 어떤 일을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만큼, 그 선택의 범위 안에 들지 않은 다른 일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고 잊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서열을 매기지 않는 채로 올해 내맘에 어떤 흔적을 남긴 글과 말, 사건들을 떠올려본다.   

“개인의 불안전한 행동이나 위험한 행동은 반드시 그 배경이 되는 원인이 존재한다. 개인의 불안전한 행동을 탓하기에 앞서 그 행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야 하지만 이번 사고에서도 발전회사는 사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피해를 입은 ‘사람’ 내지 ‘행동’을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현장 순회 점검 시 설비 이상 여부를 확인하고 이상 발견 시 구체적인 원인을 기록하고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 지침을 가장 충실하게 따랐던 고인을 스스로를 죽인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역설은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  

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청년비정규직 고 김용균 1주기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을 마치고 고 김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광화문 분향소에서 분향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9월에 발간된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조사결과 종합보고서’는 내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가, 누구의 고통 위에 나의 안녕이 불안하게 서 있는가를 피할 도리 없이 들여다보게 해주는 기록이었다. 600쪽이 넘는 보고서는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끼여 스러진 청년노동자의 죽음의 원인을 100개가 넘는 표와 그림으로 건조하게 기술한다. 그러나 행간에서는 피가 튄다. 이 보고서는 지금도, 훗날에도 2019년의 한국 사회를 증언하는 참혹한 사료로 남을 것이다. 

한껏 늘어져있던 휴일 저녁, 구하라씨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소스라쳤던 느낌은 오래 떨쳐지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은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사람의 손을 놓친 아득함이었다. 최진리(설리)씨와 구하라씨는 오랜 시간 악성댓글과 그것을 공장생산하듯 확산하는 대중매체가 휘두르는 폭력에 노출돼 왔지만, 한국 사회는 그 폭력을 스타가 흔히 겪는 유명세로 치부하며 방관해왔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 '벌새'의 한 장면. 콘텐츠판다·엣나인필름 제공

나의 알량한 자책이나 과잉된 책임감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김보라 감독이 만든 영화 <벌새>의 대사들이다. 한문학원의 영지 선생님은 강남 아파트촌의 철거민 컨테이너를 보며 불쌍하다고 말하는 열네 살 제자 은희에게 “함부로 동정할 수는 없어. 알 수 없잖아”라고 말한다. 머지않아 은희는 사라진 영지 선생님을 “이상하다”고 평하는 학원 원장에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라고 맞선다. 타인을 대하는 윤리가 어떤 겸허를 갖추어야 하는지를 단단하게 함축한 말이다. 지극히 적은 사회적 맥락만을 경험하고 사는 주제에 이런저런 세상일을 다 아는 듯이 말하다가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과속방지턱처럼 불쑥불쑥 내 안에서 솟아오를 때면 부끄러워진다. 

2020년엔 달라질까. 소설가 김금희는 뭘 하며 살아갈지 앞날이 막막한 두 친구의 대화 속에서 희망이나 계획, 혹은 반성 같은 단어 대신 이런 다짐을 주고받게 한다. “잘은 모르지만 나빠지지는 않으려고.” “그래, 나빠지면 안되지. 그거면 되지.”(<아이리시 고양이> 중)

속절없이 다가온 12월, 주문을 외듯 그 말을 따라해 본다. 나빠지지 않겠다고 해. 어디서든 그러자고.

<정은령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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