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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청산은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과제다. 누가 대선에서 승리하든, 국민통합과 연정이 어떤 형태로 추진되든 간에 적폐청산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 관행과 부패, 비리는 온전한 민주공화국이라는 비전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이기 때문이다.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근본적 수준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에 직면했을 때 가장 흔한 반응은 ‘도대체 왜 이게 여기에 있나?’ 하는 짜증이다. 짜증 수준에 생각이 고착되면 대부분은 ‘대책 없이 화를 내거나, 먼 곳으로 떠나버리거나 눈을 감아 외면’한다. 다음으로 흔한 반응은 ‘저놈들 때문이야’ 하는 책망이다. 책망 수준에 고착되면 ‘상대를 제압하거나, 배제하거나 절멸’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집단수준에서 발현되면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분열의 길로 치닫게 된다. 지금도 지구상 어디에선가 계속되고 있는 인종 학살도 출발점은 대개 책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흔한 반응은 ‘비리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시스템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결핍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핍 수준에 고착되면 ‘눈앞의 결핍을 메꾸는 반복적인 임시처방’에 빠져든다. 반창고투성이의 시스템이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장애를 만들고 지속시키는 저변의 원인을 찾는 근본적 접근이 필요하다. 근본적 접근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장애 그 자체에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냉철하게 직시한다. 둘째, 오늘의 장애는 어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셋째,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장애의 원인 제공자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넷째, 각각에 가치판단을 적용할 수는 없더라도 서로 엮이어 문제를 창출하는 모순상황을 찾아낸다.

조직의 비전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를 분석하는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에게 들려주는 우화가 있다. 옛날 옛적, 길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두 마을이 있었다. 한 마을은 농사를 짓고 다른 마을은 사냥도구를 만들었다. 어느 날 거대한 공룡이 나타나 길 위에 누워버려 마을 사이의 왕래와 교역이 불가능해졌다. 사람들은 공룡을 창으로 공격했지만 견고한 가죽에 창은 산산조각이 났다. 올가미로 묶어 끌어내려고도 했으나 밧줄은 공룡이 내뿜는 불길에 타버리고 말았다. 몇 달간 갖은 방법을 다 써봤지만 희생자만 늘어나자 사람들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사냥도구를 만드는 마을엔 식량이 다 떨어졌고 농사를 짓는 마을엔 사냥도구가 동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호기심 많은 동네아이가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공룡을 바라보다가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마을에 사는 한 노인이 공룡의 입 바로 앞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있는 것 아닌가? 아이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노인에게 몰려가 멀리 떨어진 다른 장소에 쓰레기를 버리라고 요청했다. 노인은 공룡은 생각하지도 못했고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쓰레기를 버려왔다고 변명하였다. 이후 공룡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두 마을은 서로 왕래하며 예전처럼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우화에서 공룡도 노인도 ‘악’은 아니다. 공룡은 단지 편하게 먹으려 했고 노인은 단지 집 근처에서 음식물이 썩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사람들은 공룡을 장애로 인식하고 공격했지만 원인 제공자는 마을 내부에 있었다.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는 작은 행위가 거대한 공룡의 탐욕과 맞물려 마을 사람들의 삶 자체를 위협하는 모순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공룡은 왜 그곳에 버티고 있는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적폐들은 왜 만들어졌고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 그것들이 사회 요소요소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누가 적폐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있는가? 적폐의 탄생과 연명에 우리가 뭔가를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추구하는 개인적 성공, 부의 축적, 삶의 편의가 우리의 삶 전체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적폐라는 거대한 공룡을 불러들이는 모순이 여기에도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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