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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폐정지는 보통 사망진단서에 기록되지 않는 사인이라고 했지만 나는 심폐정지가 사인으로 적힌 사망진단서를 본 기억이 있다. 아버지였던가. 잘 모르겠다. 심장이 멎는 것 말고 다른 이유로 죽는 사람도 있어? 형제들끼리 어이없는 실소를 나누었던 기억만 있다. 뇌출혈로 쓰러졌고, 수술을 했고, 그대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렇게 22개월을 더 살았다. 병원치료는 4개월쯤 중단했다. 한방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치료의 개념은 아니었다. 몇 달 후 아버지는 집으로 왔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상태였다. 식물인간을 집에서 돌보기 위한 의료비용도 적지는 않았지만 병원비보다는 덜했다. 그때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연명치료라는 단어를 배웠는데, 앞으로 누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연명치료는 절대 하지 말아 달라고 서로에게 당부했다. 죽음의 존엄에 대해서도 그때 처음 생각했던 것 같다.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각 인근 횡단보도에서 시민모임인 ‘검은티행동’ 회원들이 백남기씨를 추모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죽음에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허락된다면 시어른 중 한 분의 죽음이 그러했다. 말기암 진단을 받은 후 수술도 항암치료도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대신 그분은 당신의 생을 스스로 정리했다. 여행하며 찍은 사진을 모아 전시회도 하고, 에세이와 함께 책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만나지 못했던 이들을 만나고, 병세가 조금 깊어진 즈음에는 다니는 성당의 신부님과 당신의 장례일정에 대해서도 의논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는 치과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주무시던 모습 그대로 떠나셨다. 함께 생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서일까. 장례식 기간 내내 남은 가족들의 모습도 의연하고 덤덤해서 보기에 참 좋았다.

역시 암 진단을 받고 투병 대신 미 대륙 횡단에 나선, 그래서 ‘드라이빙 미스 노마’로 불리던 91세의 노마 할머니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아들 내외와 함께 무려 1년을 여행했다는 사실은 존경을 넘어서 질투까지 불러일으켰다. 여행이 부러운 것이 아니었다. 죽음을 곁에 두고 죽음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자아와 일상을 지킬 수 있다는 그 의연함이 부럽고 또 부러웠다. 노모의 선택을 지지하고 함께한 아들 내외의 의지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백남기 농민의 임종 즈음 자녀의 해외 체류로 구설이 많았다. 나는 그 체류가 여행이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것이 일상을 지키는 자의 존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누워 있던 22개월 동안 우리 가족에게 여행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루하루 죽음을 준비하고, 하루하루 소생을 기대하면서 우리는 집단 자폐의 시간에 빠져들었다. 환자 가족이라는 심각하고 절박한 정체성 말고는 어떤 자아도 허락되지 않았다. 조금만 다른 표정을 지어도 세상이 물었다. 아빠는 이제 괜찮아? 가면을 쓰고 일터와 집만 오고 가며, 가족만이 유일한 말벗이었다. 가족만이 유일하게 만만했다. 우리는 좁은 공간에 갇힌 쥐들이 그러하듯 서로를 할퀴고 상처 냈다. 그게 시간을 버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달았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보내서는 안됐다. 내일 당장 어떤 상황이 생긴다 하더라도 오늘 하루의 자존과 존엄과 일상을 잃지 말아야 했다. 환자도 그렇지만, 그 옆을 지키는 가족은 더더욱 그러해야 했다. 웃고 울고, 휴가를 즐기고, 일상을 살아야 했다. 슬픔과 고통은 어떠해야 한다고 당사자도 아닌 타인이 만들어놓은 매뉴얼 따위는 신경 쓰지 말아야 했다. 중환자 혹은 난치병 환자를 가족으로 두고 있는 경우, 대개의 가정은 해체된다. 막대한 의료비도 문제지만 가족이 환자의 간병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의 정서적 억압이 초래하는 문제도 크다. 현재 우리의 의료 시스템은 장기 치료가 필요한 중, 난치 환자의 돌봄을 전적으로 가족에게 맡기고 있다. 이들을 밖으로 불러내고, 일상을 살게 하는 일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가능할까. 국가가 초래한 억울한 죽음 앞에서 사죄는커녕 유족의 슬픔까지 간섭하고 비난하고 통제하려 드는 국가에서 존엄이, 살아있다는 것, 살아가야 한다는 것의 존엄을 말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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