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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동물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는 뜬금없이 단계론을 꺼내들었다. 진화와 발전의 정도에 따라 열 단계의 분류가 가능하다면 동물은 3에서 5의 단계에, 사람은 5에서 8의 단계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대답이었다.

인간에서 동물이 겹치는 단계도 있네? 당연하지. 어떤 동물은 갓 태어난 신생아보다 훨씬 머리가 좋을 걸. 그럼 9에서 10단계는? 물으면서 남편은 알파고를 떠올렸다고 했다. 나도 비슷했다. 사이보그나 테크놀로지, 그런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아이가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지금보다 더 진화하고 발전한 인간이지. 인류는 끝없이 진화했고 발전했으니까 앞으로도 그렇지 않겠어?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글쎄, 앞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아이의 확언처럼 진화하고 발전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의 모습은 과거보다 진화하고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3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6차 주말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서 거대한 파도를 연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어느 해, 어느 사회라고 비리가 없었을까마는 2016년의 비리는 유난히 부끄럽다. 숨겨진 사회의 치부를 고스란히 까발리는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몰랐던 것이 아니라 모른 척했던 비리, 그럼으로써 내가 동조하고 방조했던 비리들이 유독 많았다. 강남역 사건처럼 여성에 대한 범죄 사건을 계기로 숨겨진 여혐 논란이 그러하고, 역대 최고라는 청년 실업률 속에 구의역 스크린도어 참사처럼 비정규직 청년들이 무참한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일이 그러하고, 소셜미디어에서 주제를 공유하는 방식인 ‘해시태그’를 통해 문단을 시작으로 드러난 예술계 내의 성폭력 문제가 그러하다. 실력도 정체도 알 수 없는 국가대표 선수의 입시비리인 줄 알았던 사건은 비선 실세에 의한 국정농단의 단초였다. 이마저도 정치에 대한 냉소, 투표에 대한 무관심이 빚어낸 일말의 책임은 있으니 우리가 느끼는 분노의 바탕은 아마도 부끄러움일 것이다.

2016년의 비리는 공교롭게도 모두 권력의 민낯이 드러난 권력형 비리라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오랜 세월 사회적 용인이라는 말로 ‘퉁치고’ 지나쳤던 민낯이기도 했다. 우리가 힘이 없다고, 원래 세상이 그렇다고 체념하듯 방조하며 키운 범죄의 민낯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올해의 비리는 저항하는 세력을 비로소 만났다는 것이다. 남성주의, 계급주의, 정치권력의 피해자들이 비로소 용기를 내어 싸우기 시작했다. 광장의 촛불이 시간을 더해갈수록 커지듯 지난여름부터 시작된 각종 비리를 고발하는 태그들도 여전히 유효하게 진행 중이다. 광장의 촛불은 우선적으로 무능력한 지도자에 대한 책임 요구의 촛불이지만, 이 촛불 안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적 발언의 문제성을 공유하고, 청소년들의 자발적 정치참여를 어떤 방식으로 존중해야 하는가 고민하고, 시위의 여러 방법에 있어 무엇이 평화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내게는 적지 않게 의미 있어 보인다. 탄핵이라는, 즉각 퇴진이라는 우선의 목표에 집중하기 위해 소소한 논쟁을 버리고 가야 한다는 주장이 말하는 바를 이해한다. 나 또한 그것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사안이고, 결국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광장에서 벌어지는 이 무수한 담론들의 엇갈림이 탄핵 이후 우리에게 찾아올 잠시의 혼돈을 자정할 수 있는 지표가 될 거라 믿는다. 같은 것을 비판해도 같은 방식으로 비판하지 않는 태도에 대한 관용, 그것이 바로 성숙이 아닐까.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대한 아이의 대답을 듣고 생각했다. 사회에도 단계론을 적용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 몇 단계쯤 이르러 있을까. 더 나은 사회가 우리에게 남아 있을까. 우리는 사회를 진화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까. 후안무치한 권좌를 보면 그럴 리 없을 것 같고, 촛불 가득한 광장을 보면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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