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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평화로운 혁명’ 혹은 ‘피 없는 혁명’은 불가능한 꿈이거나 형용모순이었다. 구체제의 지배층이 폭력, 정보력, 자본력을 독점하고 있기에 민중 또한 무장을 하지 않고서는 이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혁명은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으며, 계급투쟁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배층이 폭력으로 억압하고 있기에 이에 맞서는 것 또한 폭력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때문에 혁명가들은 항쟁 과정에서 비폭력을 주장하는 이들을 ‘타협노선’, ‘개량주의’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피 없는 혁명’의 지평이 대한민국에서 새롭게 열리고 있다. 연이어서 100만명 이상이 모였다. 200만명에 이르는 군중들이 모였음에도 한 건의 폭력행위도 발생하지 않았다. 크고 담대하게 자신의 주장을 외쳤지만 아무도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지 않았다. 자유롭고 버젓하게 행진했지만, 차벽 앞에서는 멈추고 앉아 폭력보다 강한 항의를 했다. 다양한 계층이 모여 오랜 동안 쌓인 분노를 표출했지만, 패러디와 유머로 승화하며 한바탕 놀았다.

이렇게 열정이 넘치면서도 평화롭고, 분노가 들끓음에도 즐거운 항쟁이 가능한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 문화는 한의 문화가 아니라 ‘정과 한의 아우름’의 문화다. 정과 한은 대립자를 내 안에 모시는 대대적(待對的) 관계이다. 너무 정이 많아 한이 깊고, 한이 깊어서 정이 많다. 하지만 이를 흥과 신명으로 전환한다. 우리의 몸에는 지극한 비극과 불행과 분노를 흥과 신명으로 승화하는 문화 유전자가 내재돼 있다. 두 번째, 분노의 심층에는 공감이 자리하고 있다. 세월호에서, 거리에서, 지하철역에서 대통령의 무능과 국가폭력, 잘못된 제도와 시스템으로 죽어간 사람들과 유가족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이들을 하나로 엮어내고 있다. 공감은 분노보다 길고 강하다. 세 번째, 권력도, 자본도, 정보도 없지만 소셜미디어로 소통하며 군대와 경찰보다 강하고 빠르게 공감을 확대하고 연대하는 네트워크가 있다.

이제 역사의 기관차는 어디로 갈 것인가. “모든 혁명은 정치혁명이지만, 사회혁명일 경우에만 대혁명의 자격을 갖는다.” 탄핵이나 퇴진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지금 단계의 운동에서 머물면, 공범자인 정치인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정국은 곧바로 개헌과 대선 정국으로 전환할 것이다. 우리는 좀 더 긴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 디지털 사회는 공유경제의 영역을 늘리면서 전 분야에 걸쳐서 대혁명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프랑스대혁명조차 민중이 피를 흘려 쟁취한 혁명의 열매를 엘리트들이 가져갔다. 그럼 어떻게? 무엇보다 패러다임을 전환하자. 무역량보다 이 땅의 강과 숲에 얼마나 다양한 생명들이 공존하고 있는지, 국내총생산(GDP)보다 국민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국부를 늘리기보다 얼마나 가난한 이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국가를 경영하고 정책을 구사하자. 퇴진 국면을 이용하여 재벌개혁, 검찰개혁, 언론개혁을 단행하고, 권력기관을 시민이 통제하고 의료와 주택과 교육의 공공성을 확보하도록 헌법을 개정하자. 이를 달성할 때까지 촛불은 타오르고 광장의 정치를 조직하여 시민의회와 시민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 국민 모두가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새 하늘을 여는 아름다운 혁명의 주체들이다.

이도흠 |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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