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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을 떠난 지 1081일 만에 다시 뭍으로 돌아오는 세월호를 맞는 가족들의 모습을 4·16연대 미디어위원회가 촬영한 동영상으로 지켜보았다. 보안구역인 목포신항만의 철조망에 막힌 한 어머니는 “우리 아이들이 거기 있었다고요. 거기에서, 마지막 시간을 살려고 보냈다고요. 세월호 안에서…”라며 세월호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들여보내 달라고 절규했다. 결국 항만으로 들어선 가족들은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녹슨 세월호가 눈앞에 다가오자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아 머리를 짓찧으며 통곡했다. 화면을 지켜보는 나는 2014년 4월16일 그날처럼, 또다시 그 애끊는 오열의 무력한 목격자가 되었다.

“남을 도울 힘이 없으면서 남의 고정(苦情)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것은 단지 마음 아픔에 그치지 않고 무슨 경우에 어긋난 일을 하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도운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빈손으로 앉아 다만 귀를 크게 갖는다는 것이 과연 비를 함께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인양된 세월호가 육상에 거치될 전남 목포신항 앞 철망에 3일 희생자를 추모하고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는 글귀가 적힌 노란 리본들이 매달려 나부끼고 있다. 김창길 기자

대전교도소에서 무기징역형을 살고 있던 신영복 선생이 1985년 5월 형수에게 보낸 엽서의 한 대목은 세월호 그날 이후 내 마음에 자리 잡은 죄책감의 정체를 음각으로 한 자 한 자 새겨 놓은 것만 같은 내용이다. 저 아픈 울음을 멈추고 달랠 아무런 방도도 없이 오로지 눈과 귀를 열어둔다는 것이 도대체 통곡하는 유족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 일인가라는 무력감에서 도무지 헤어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2014년 4월16일 이후 나는 자신의 힘없음을 부끄러워하는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지하철역 입구에 서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을 받거나, 광화문광장에 몇 시간씩 앉아 노란 리본을 만들거나, 시민들에게 세월호 배지를 나눠주는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먹일 따스한 밥을 지은 사람도 있었고, 신부가 되고 싶어했던 세월호의 아이를 위해 그 아이의 이름을 딴 작은 성당을 지은 목수도 있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내가 이만큼이나 했다”고 자부하는 이는 없었다.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라고 할 뿐이었다. 그러나 주체와 타인의 관계의 철학자인 레비나스를 연구해온 철학자 강영안의 관점을 빌리면, 그들은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기꺼이 맞닥뜨림으로써 최소한의 윤리적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다.

“타인의 얼굴과 접할 때, 그에게 귀 기울일 때, 그때 윤리가 경제적 삶에 침입하게 된다. (중략) 윤리는 봄이고 동시에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강영안, <타인의 얼굴> 중)

세월호가 마지막 항해를 하던 그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함께 서울구치소에 갇혀있다. 한자리에 모인 이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를 헤아렸어야 할 위치에 있을 때 외면했다는 것이다. 아니 외면을 넘어, 고통을 호소하는 타인의 입을 틀어막으려 하거나, 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했다는 정치에서 윤리를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다시 신영복 선생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는 출소를 앞두고 자신에게 일자리 하나 주선해주기를 부탁하는 젊은 동료 수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고정(苦情)에 자주 접하게 됨으로써 아픔이 둔감해지는 대신에 그것이 고정의 원인을 깊이 천착해 들어갈 수 있는 확실한 조건이 되어주길” 바랐다. 그리하여 누군가 비를 맞고 있는데, “저 혼자만 쓰고 있는 우산은 없는가를 끊임없이 돌이켜보는 엄한 자기성찰의 계기가 되길” 소망했다.

세월호의 고통 앞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일, 그것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윤리를 실천하며 살아가기 위함이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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