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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으로부터 자문 요청을 받았다. 사건이 발생했기에 즉시 위원회를 소집해 성희롱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징계절차에 회부했단다. 그런데 징계절차 중 학내 근거 규정을 다시 살펴보니 이 사안이 과연 성희롱이 맞는지 반론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변호사 자문을 구했더니 법률상 성희롱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회신이 왔다고 했다.

성희롱으로 보이지만 성희롱이 아닐 수도 있다는 당혹스러운 의견은, 적어도 법리적으로는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해당 대학의 규정에는 “이 지침에서 사용하는 ‘성희롱’이란 양성평등기본법 제3조 제2호에 따른 성희롱을 말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양성평등기본법에 따르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업무, 고용 그 밖의 관계’하에서 ‘국가기관 등의 종사자’가 행한 점, 그리고 ‘지위 이용 또는 업무 관련’이라는 점까지 전부 인정되어야 비로소 이 법에 따른 성희롱이 된다.

학생 사이의 성적 언동이라면 어떤가? 이것이 업무·고용 등의 관계에서 있었던 것인가? 학생이 국가기관이나 공공단체의 ‘종사자’인가?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와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직원이 업무일 아닌 휴일에 사무실이 아닌 곳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어느 학생에게 같은 대학의 직원임을 밝히지 않고 혐오스러운 성적 언동을 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까지도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관련성이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이는 굴욕감을 주는 성적 언동이라는 측면에서 분명 성희롱이지만 법률에 따라 적절히 규제되지 못하고 있는 사례들이다. 대학 내 성희롱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학생 간 성희롱은 놀랍게도 법률상의 정의에 따른 성희롱이 아니다.

대학이 성희롱 예방 규정을 마련할 때, 법에서 정한 내용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하리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법에 이렇게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리라고 어느 누가 생각하겠는가. 그러다보니 이런 웃지 못할 촌극이 발생한다.

‘업무·고용 등’ ‘지위 이용이나 업무 관련’ 등의 요건은 당연히 성희롱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성적 언동을 법률상의 성희롱으로 포섭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서울대의 경우, 대학 내에서 발생 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위와 같은 요건을 모두 배제하고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일체의 언동을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폭넓게 정의하는 것이 위법한 것도 아니다. 규제되어 마땅한 것을 빠짐없이 규제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핵심이다. 법률 규정을 그대로 따온 성희롱 예방규정을 아직 유지하고 있는 여러 대학들에서는 현실과 필요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조속히 관련 규정을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박찬성 | 변호사·서울대 인권센터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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