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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후, 지하철 2호선을 탔다. 구의역에 가기 위해서였다. 날씨는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이 맑았고, 초록 잎들은 빛났다. 이렇게 찬란한 5월에 살아 있었으면 스무 살이 되었을 청년의 1주기라니, 그 역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구의역 9-4번 승강장 스크린도어는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하루 전날인 27일 추모제가 열렸을 때는 김군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스크린도어 여기저기에 붙고 바닥에는 흰 국화가 놓였다는데 28일에는 흔적도 없었다. 한적한 휴일 오후이다 보니 10-4번으로 끝나는 역사의 뒤쪽까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오는 승객들도 없어, 9-4번 승강장 앞은 고즈넉했다. 그래도 일부러 9-4번 승강장을 찾아온 사람들은 눈에 띄었다. “1호선을 주로 타고 다니는 중학생”이라고 밝힌 한 소년은 목에 맨 커다란 카메라로 9-4번 승강장의 모습이 잡히도록 역으로 달려 들어오는 지하철의 모습을 반복해서 찍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중년 여성이 청소년기의 아들과 함께 9-4번 승강장 앞을 두리번거리다가 발길을 돌렸다. “저희 큰애가 올해 스무 살이에요. 김군이 살아 있었으면 우리 아이와 같은 나인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저도 노동자예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 1주기를 앞둔 25일 사고 지점인 구의역 승강장에 국화꽃이 놓여 있다. 지난해 5월28일 비정규직 청년노동자가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중 전동차에 부딪혀 사망했다. 강윤중 기자

지난해 10월 드라마 제작현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은 이한빛 전 CJ E&M PD는 구의역에서 김군이 목숨을 잃은 직후 9-4 승강장을 찾은 뒤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생을 향한 노동이 오히려 생의 불씨를 일찍, 아니 찰나에 꺼뜨리는 허망함. 이윤이니 효율이니 헛된 수사들은 반복적으로 실제의 일상을 쉬이 짓밟는다.”

공고를 졸업하고 비정규직으로 취업했던 구의역의 김군은 정규직이 될 꿈을 품고 있었다. 끼니조차 거르며 ‘1시간 이내 장애발생 현장 도착’이라는 수칙을 지켰고 그 수칙을 지키기 위해 2인1조 작업 원칙을 어긴 채 혼자 수리를 하다 변을 당했다.

정규직이었던 이한빛 PD가 꿈꿨던 것은 “사회에 따뜻한 메시지를 던져서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작 제작현장에서 해야 했던 일은 계약해지된 동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선지급금을 환수하는 일이었다. 월급을 쪼개어 KTX 해고 승무원들을 돕는 데 썼던 그가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고 이한빛 PD 유서 중) 하는 삶의 부조리를 견뎌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구의역에서 다시 2호선을 타고 시청 방향으로 15분을 더 달리면 평화시장이 있는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 평화시장 입구에는 생전에 평화시장을 ‘내 마음의 고향, 내 이상의 전부’라고 했던 전태일의 동상이 서 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전태일 평전> 중)고 전태일이 고발했던 것이 거의 반 세기 전인데, 구의역의 김군도, 상암동의 이한빛 PD도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살자고 하는 노동이 삶을 꺼뜨리는 현실에 맞닥뜨려야 했다.

문재인 정부가 제1의 과제로 삼고 있는 것은 일자리 만들기다. 대통령 집무실에 걸린 ‘일자리 상황판’의 18개 지표 중에는 고용률, 취업자 증감뿐만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 근로형태별 연간 근로시간 등 일자리의 질을 나타내는 것들도 있다. 열아홉 살에 스러진 김군의 꿈도, 스물여덟에 생을 접은 이한빛 PD의 절망도 그 상황판에 별빛처럼 또렷이 드러나야 할 것이다.

구의역 김군의 1주기 행사가 있었던 27일 이한빛 PD의 아버지는 9-4번 승강장을 찾아 이런 다짐을 적어 스크린도어에 붙여 놓았었다. “남은 일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어 줄테니 부디 편안하게 지내기 바라오. 젊은이가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회를 우리가 만들어줄게.” 부디 남은 우리가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정은령 |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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