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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익기 선생님, 지난 4월 밑부분이 검게 불에 탄 훈민정음 상주 해례본 사진을 보며 국어학자로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최고 문화재가 저렇게 무참히 훼손되어도 되는가 하는 회의감이 소용돌이쳤습니다. 선생님께서는 4·12 국회의원 재선거에 입후보하면서 당선되면 해례본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낙선했으니 그 약속은 해례본처럼 불에 타 버릴 것이라는 걱정이 앞섭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글자의 창제 방식과, 음가, 그리고 운용방식 등을 자세히 풀이한 책입니다. 선생님, 지금까지 세상에 밝혀진 해례본은 두 문헌뿐입니다. 선생님께서 소장하고 있는 해례본과 간송 전형필 선생께서 입수해서 소장하고 있는 해례본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들을 각각 상주본, 안동본으로 약칭해 부르기도 하는데 안동본은 간송 선생께서 한국어 말살 정책을 펼치던 일제강점기에 거액으로 사들여 목숨 걸고 숨긴 것입니다. 6·25 때에는 오직 그 해례본만을 가슴속에 챙겨 부산으로 피란했습니다. 그 뒤 해례본을 세상에 공개해 국보가 되도록 했으며 국어학자들에게 연구의 손길이 닿게 해 훈민정음의 문자 가치를 세상에 떨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해례본의 언어학적 가치가 치솟자 1997년에 유네스코는 안동 해례본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문자자주독립선언서인 동시에 세계 초일류 문화재로서 거룩한 문자 경전인 것입니다. 국운이 가물거리던 때 이러한 문헌 가치를 잘 알고 거금을 들여 안동 해례본을 사들인 간송 선생의 선지자적 정신이 오늘날 더욱 빛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해례본이 더 발견될 수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생님께서 소장하고 있는 상주본이 더욱 간절하기만 합니다.

선생님께서 상주 해례본을 세상에 내보여야 할 이유를 생각했습니다. 첫째, 상주본은 현재 보관이 취약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한지에 인쇄된 상주본의 보관 상태는 지금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정상적이라면 그것은 항온·항습이 유지되고 방화 및 도난 예방을 위해 박물관과 같은 특별 공간에 보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에 탄 상주본은 이러한 보관 방식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상주본은 하루빨리 전문 보관소로 옮겨 엄격한 관리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상주본은 국어학자들의 연구 손길이 닿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개 사진을 보니 상주본 상단과 하단에는 안동본에서는 볼 수 없는 학자의 문자 견해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미 안동본을 통해 훈민정음의 문자 체계와 그 사료적 의미가 밝혀졌습니다만 시대별 학자의 어문학적 견해가 쓰여 있는 상주본은 또 다른 큰 연구 성과를 안겨 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생님께서는 상주본을 공개하여 학자들의 연구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어야 합니다.

셋째, 상주본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민족 최고의 정신 문화재이기 때문입니다. 조상들이 남긴 문화재는 돈으로 거래되기도 합니다만 세계 유일의 문자 경전인 해례본은 세속적인 금전 환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종대왕의 숭고한 문자 창제 정신을 여지없이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생님께서 상주본을 공개하는 일은 세종대왕의 뜻을 기리는 겸허한 행위로 세상과 자자손손에 오래도록 칭송될 것입니다.

민족 문화재를 아끼시는 배익기 선생님, 5월15일은 세종대왕께서 탄생하신 지 620돌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겨레의 문화 창달을 위한 문자 창제의 뜻이 5월 하늘에 더욱 높고 푸르게 번지고 있습니다. 현명한 판단으로 선생님의 민족문화 애호심이 이 계절에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방운규 평택대학교 국문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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