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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한 지난 주말. 평소 활동하는 SNS에서 손가락이 얼얼할 만큼 이모티콘을 눌렀다. 크게 흥분하거나 몰입해서 볼 만큼 스포츠 애호가는 아니지만, 기적에 가까운 막판 골을 확인하는 순간 벅찬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경기와 관련된 모든 글과 사진에 하트와 스마일을 누르고 또 눌렀다. 아이처럼 신났고 평범한 농담에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기쁨에 겨워 남긴 나의 짧은 글에 달린 이모티콘들을 보며 묘한 감동을 느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점 차이나 정서적 차이, 관심사의 차이 등으로 소원했던 수많은 온라인 친구들의 흔적이 찍혀 있었다. 흔히 국뽕이라고 하는 과도한 자국 이기주의에 신중한 사람들도, 자신과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분노하며 비아냥대던 사람들도 그날 그 시간만큼은 하나가 된 듯했다. 2002년 길거리에서 낯선 이들과 부둥켜안았던 순간처럼, 모든 이가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대한민국이란 정체성으로 경계를 허문 순간이었다. 생각하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가가 무엇이길래.

베네딕트 앤더슨을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은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이며, “국가 역시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바다를 유영하는 물고기나 하늘을 나는 새에게 국적이 무의미하듯, 유사 이래 끝없는 영토 개척과 정복전쟁 속에서 때로 분열하거나 새롭게 결합하며 진화 발전해온 인류에게 민족이나 국가란 특정 시간과 공간 속 임의의 공동체일 뿐이다.

하지만 그 임의의 시공간에서 함께 울고 웃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월은 결코 가볍지 않아서, 특정한 순간에 그들 모두를 하나로 인식하게 만든다. 내 몸으로 낳은 혈육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 안고 품으며 기른 자식도 가족이 되듯이. 결혼으로 맺어진 이들만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 부비고 마음 부비며 사는 이들 모두 가족이 되듯이. 공통의 공간에서 공통의 역사와 사건을 함께 겪어온 동시대인들은 부지불식간 깊은 동질감과 유사성을 느끼며 유사가족이나 확대가족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개개인이 가진 기질이나 습성, 사회적 지향성 등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넓은 세계로 나가면 어쩔 수 없는 한국인임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효율적이고 빠른 해결방법을 선호하고 요령을 잘 찾아내는 특성 같은 것이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지리적 특성과 비좁은 영토, 연교차 큰 기후, 부족한 자원 등 안락함이나 여유와는 거리가 먼 공간에서 오랜 시간 나름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지키며 버텨온 이들이 터득한 생존기술이자, 유연함이 필요한 급변하는 세계에서 약진하게 된 원동력이기도 하다. 실제로 마케팅 전문가들이 보는 한국 시장의 고객 특성 세분화 결과는 다양한 이들이 모여 사는 나라들에 비해 단순한 편이다. 심리학자들이 보는 남녀의 특성 차이도 매우 적은 나라에 속한다. 사람들이 갈등을 겪는 이유는 서로 달라서일 때도 있지만, 대한민국 갈등의 상당수는 서로 너무 닮아서 겪는 가족 갈등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원하건 원치 않건 한배를 탄 공동 운명체이자 확대가족인 국민들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분열과 혐오의 마음이 들끓었던 한 해가 저물어 간다. 화합보다는 이간질을 통해 부와 권력을 연명하는 이들이 달라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골 하나에 눈 녹듯 풀리는 섭섭함, 선수의 부상에 함께 애끓는 마음이 우리 내면에 잠재된 확대가족애다. 현명한 국민들 스스로 이런 자신들의 사랑과 이해의 능력에 더 큰 노력을 기울이는 새해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자신과 가족만 아끼는 이기주의, 내 연고와 내 민족만 위대한 배타주의는 위험하지만, 내 자신과 가족, 내 주변과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이들의 인류애 역시 공허하기 때문이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연재 | 공감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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