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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는 임기를 시작하며 ‘다시 도약하는 대한민국, 함께 잘 사는 국민의 나라’를 국정운영 비전으로 내세웠는데, 용산 집무실 이전과 전임 정부의 뒤를 캐는 데만 힘을 쏟고 있다. 집권 초반임에도 고정 지지층 30%에 머무는 지지율은 시민들과 공유하는 비전이 없음을 뜻한다.

행정 혼란은 누구의 책임인가

안타깝게도 동행·매력 특별시를 내세운 오세훈 서울시장의 행보도 비슷하다.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임기를 먼저 시작했음에도 새로운 비전보다는 전임 시장의 핵심사업들을 없애고 시민단체들을 비난하느라 초반의 에너지를 다 쓰고 있다. 서울시는 오랫동안 운영되어온 마을공동체나 도시혁신과 관련된 사업들을 다른 대안 없이 종료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관련 센터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갑작스레 직장을 잃었고, 이런저런 사업에 참여하던 주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런 행태가 이전에 없었던 특별한 일은 아니다. 보통 선출직 공직자들이 교체되면 전임자들의 성과는 원점에서 재검토되었고, 전임자들이 열심히 추진했던 사업들은 사라지곤 했다. 새로 부임한 공직자들은 자신의 대표업적이 될 만한 대형사업들을 추진하면서 관련 부서를 만들고 예산을 집중시켰다.

문제는 이런 관행이 정치인 개인에게는 좋을지 모르나 시민들에게는 좋지 않다는 점이다. 시민의 안전과 관련된 사업이나 복지의 수준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사업들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중단되거나 축소되면 시민들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일궈놓은 좋은 사업들조차 전임자가 선호했다는 이유로 사라진다.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인가? 

더구나 사업을 축소하고 전환하는 과정에서 비합리적인 일들도 속출하고 있다. 최근 대전광역시는 차별금지법을 노골적으로 반대했던 목사가 대표로 있는 단체에 대전시인권센터를 위탁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해당 사업들과 관련이 없거나 경험 없는 단체들이 중간지원조직을 위탁받는 일이 생기고 있다. 시민참여와 관련된 기구나 사업들의 예산이 이유 없이 대폭 축소되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이런 소란이 반복되고 있다.

선출직 공직자의 욕심과 잘못된 판단을 제어하는 내부장치가 관료제인데, 한국에서는 이마저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제어는커녕 선출직의 문제를 더욱더 확대시키는 것이 한국 관료제의 현실이다. 잘못된 판단을 견제하기는커녕 누가 당선되든 그 사람의 구미에 맞는 정책을 미리 만들어놓고, 관료들이 앞장서서 전임자의 흔적을 지운다. 

생각하지 않는 관료의 위험성

관료제는 정책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보장하고 선출직 공무원의 교체가 가져올 위험을 줄여야 하는데, 외려 위기를 심화하고 있다. 흔히 관료제는 ‘분노도 편견도 없이(sine ira ac studio)’ 움직이며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업무를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공정하게 수행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세월호 참사에서도, 이태원 참사에서도 내부의 문제를 인정하며 책임지겠다는 관료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래서야 관료제가 시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까?

관료들의 목표가 공공성이 아니라 승진이 될 때, 제도는 쉽게 부패한다. 정부의 정책이 시민의 안전과 복지, 권리 강화보다 특정 정치인의 성과로 향할 때 권력은 위험해진다. 통치의 문제가 드러나면 스스로 판단하고 거부하고 외부로 공론화하는 관료들이 있어야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반대 경우라면 관료제와 통치의 정당성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에서 권력자의 명령만을 따랐던 관료들은 어떤 길을 걸었을까? 사상가 한나 아렌트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운영했던 독일의 전쟁범죄자 아이히만에게서 봤던 건 악의 평범성만이 아니었다. 아이히만은 국가의 명령을 받았다는 이유로 상당한 열정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유대인 수백만명을 가스실로 인도했다. 탁월한 계산능력에 비해 그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고 점점 더 타인과 소통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그런 아이히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연재 | 하승우의 풀뿌리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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