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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생각은 널리 퍼져 있다. 감히 경상도 사람들의 영혼이 조금 모자란다거나, 혹은 평안도 사람의 영혼이 조금 붉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게다. 이런 식의 공평성은 필경 인간의 문화제도적 성취 중의 일부로, 보편성을 주장하려는 그 모든 제도에 필수적이다. 무릇 보편성을 내세우는 시스템은 제 나름의 공평한 전제를 갖추려고 하지만, 특히 종교나 유사종교적 제도들은 대체로 영혼, 혹은 영혼스러운 것의 균등한 토대에 터해 있는 법이다. 그래서, 양심이나 영혼 등은 원리상 균등하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긴다.

공부를 제법 많이 한 이들 중의 일부는 ‘영혼’이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혹은 니체식의 태도를 본받아 이 말을 가급적 쓰지 않도록 조심한다. 사실 이들의 비판적 입장에는 눈여겨볼 만한 쓸모가 있다. 영혼이라는 무거운 말 속에 이윽고 정착하게 된 인류의 지적·영성적 모색에도 배울 바가 있지만, 이 말을 우회하려는 노력 속에도 참신한 고민의 흔적은 역력하다. 대략 분류하자면, 우리 주변에는 영혼이라는 말을 매우 무겁게 사용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재롱부리듯 가볍게 놀리거나 혹은 아예 이 말의 용법에 담을 쌓은 이들도 있다.

내 제안은 이 둘에다 또 하나의 길을 덧붙이는 것이다. (이후의 글은, 기고문은 짧고 생각은 길어 다소 독단적으로 쓸 테니 그리 아시기 바란다.) 이 문제에 대해 내가 뚫으려는 길은, 영혼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없지도 않다는 얘기와 같은 것이다. 영혼이 없다는 말은 전통적인 종교신학적, 혹은 민간신앙적 통념에서 조금 비껴 서보자는 뜻이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그 일상에서 완벽히 동떨어진 채 공짜로 주어져 ‘있는’ 그런 것은 아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청 광장에서 펄럭이는 노란 리본 (출처 : 경향DB)


내게 있어 영혼이 있다는 말은 그것이 쉼없이 생성된다는 뜻이며, 설명의 요점은 그 생성의 여러 방식과 그 창의적 실천에 있다. 내가 체험(!)하는 그 첫 방식은 우선 ‘감사’의 행위와 관련된다. 그러나 감사를 한 사람은 그걸로 끝이고, 감사를 제대로 받은 사람도 제 몫을 챙겼으니 영혼에 관한 한 별 볼 일 없다. 영혼은 늘 감사받지 못한 데서 생기는데, 그 부족(不足)을 아무도 모르게 삼켜버린 것이 그 알속이다. 욕망을 삼켜버린 데서 무의식이 자리 잡듯이, 그 감사의 빈곤을 넉넉히 삼켜서 만들어낸 것, 그것이 바로 영혼의 젖줄이다.

그런가 하면 특히 이 자본제적 세속 속의 영혼은 ‘변명’의 행위와 관련된다. 왜냐고? 자본주의를 포함한 권력체제 일반은 꼭 변명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변명은 해명도 설명도 공명(共鳴)도, 그리고 사람의 숙명도 아니다. 흔한 말처럼 불안이 아니라 변명이 영혼을 갉아먹는다. 해명도 설명도 하지 못하는 체제, 공명을 얻지 못하는 체제, 그리고 그 모든 변명을 숙명으로 강요하는 체제는 죄다 영혼이 없는 사물이다. (그러나 정성은 ‘사물’에게도 영혼의 기색을 보탠다!) 자기 변명을 삼켜버리는 아득한 실존의 빈곳, 빈곳에서 영혼의 지하수가 방울방울 솟는다. 이른바 ‘사회적 영혼’이란, 바로 이 방울방울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억울함으로 목놓아 우는 이들은 밖을 향해 소리를 높이는 한편, 자신의 속이 변해가는 기미를 살펴야 한다. 말해도 닿지 않음, 울어도 풀리지 않음, 그리고 위로받아도 당치 않음 속에서 생성되고 있는 또 다른 영혼의 씨앗을 살펴야 한다. 말해도 닿지 않음으로 말해야 하고, 울어도 풀리지 않음으로 울어야 하고, 위로받아도 당치 않는 무연(憮然)함 속에서 바로 그 위로의 너머에서 생성되고 있는 다른 영혼의 자화상을 응연히 살펴야 한다.

주어진 영혼이 아니라 생성되는 영혼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조형하려는 길은 꾀바른 우회로가 아니다. 치유 허무주의(therapeutic nihilism)가 아니다. 각박한 현실을 봉쇄하는 낙도주의(樂道主義)의 현대판도 아니다. 명상, 고백, 도도한 자기성찰만이 영혼에 기여하는 게 아니다. 외려 그같이 오연한 자기를 깎는 속에서야 어렵사리 영혼은 생긴다.


김영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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