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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약 2년 전 이 정치시평 칼럼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어떻게 증오가 극우정치를 낳고 있는지를 검토한 바 있다(‘증오로 하나 된 세계’ 경향신문 2017년 1월2일자). 그 칼럼의 제일 끝에는 “1000만 촛불로 열린 광장의 결실이 대선 결과로만 판단되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광기의 시대에도 온전히 우리를 지킬 수 있는 이성과 관용의 제도화가 그 결실이 되어야 한다”라고 썼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난 2년간 이성과 관용의 제도화는 그다지 진전을 보지 못했고, 한국 사회에서 증오 혹은 혐오는 위험수위를 넘나들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문제가 되어왔던 몇몇 혐오 사이트에 이어 기어코 폭행사건으로까지 이어진 여혐과 남혐, PC방 알바생이나 폐지 줍는 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무차별 살인에 이르기까지 이제 우리 사회에서 혐오는 일상이 되었다.

혐오는 가해자와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는 사회자본이 낮아지고,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며, 부패가 늘어나고, 정부효과성이 낮아지고, 양극화가 심해진다는 연구들이 쌓여있다. 혐오는 방관자를 포함해 모두를 패배자로 만든다.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인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혐오의 공급과 수용에 대한 모델을 내놓은 바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정치꾼들이 상대 정파를 공격하는 흔한 방법은 그들의 정책으로부터 혜택을 보는 소수집단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것이다(혐오의 공급). 정치꾼이란 직업정치인뿐 아니라 주목받고 싶어하는 정치지망생, 선정적 미디어 등을 모두 포함한다. 이때 그 부추기는 이야기가 사실일 필요는 없다.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가 말했듯이, 선동의 효과는 진실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반복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이 이야기들이 사실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할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에 반복될수록 더 많이 받아들인다(혐오의 수용).

진보정부의 분배지향적 정책에 반대하고 싶은 보수정치세력은 가난한 사람들을 나태하고 게으르고 남에게 얻어먹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며 혐오를 부추긴다. 보수정부의 성장위주 정책에 반대하고 싶은 진보정치세력은 부자들을 욕심 많고 탐욕적이고 편법으로 축재했다며 혐오를 부추긴다. 올바른 정책을 뚜벅뚜벅 실천하면 언젠가 국민들이 알아줄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정책입안자의 탁상공론이 될 공산이 크다. 올바른 정책을 하면 할수록 상대방은 혐오를 부추기는 이야기를 퍼뜨릴 인센티브가 그만큼 더 커지기 때문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인권을 중시하는 정부에서 혐오가 늘어나는 일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그들을 혐오의 표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노예해방 이후 오히려 흑인의 이미지가 ‘멍청한 일꾼’에서 ‘폭도’나 ‘강간범’으로 바뀌었다.

근거 없는 혐오를 일단 수용한 가해자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오히려 자신이 원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아내를 때리거나 사람을 죽여놓고는 남들이 자신을 공격하거나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로서는 가해가 아니라 복수인 셈이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묻지마 살인에서도 비슷한 동기들이 확인된 바 있다. 공격당했다는 심리가 방어본능을 일으키고 이것은 혐오와 폭력으로 이어지는데, 그 첫 번째 피해자는 가장 손쉬운 희생양인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다. 공격당했다는 심리를 느끼는 것 자체가 스스로도 사회적 약자라는 뜻이다. 결국 혐오는 약자가 약자를 공격하도록 만든다. 최근 문제가 되는 여혐과 남혐이 주로 세대적 약자인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일베에 대한 김학준의 통찰력 있는 연구는 그들의 혐오가 가장 체제순응적이라고 말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분노는 표출되는 대신 응어리져 사적 공간으로 침잠”하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 평범 내러티브를 내면화하여 현실적인 순응을 강조하는 것이 일베적 멘털리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혐오는 어차피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잘난 척 나대지 말라는 경고(민주화운동 혐오)이거나, 나는 이 암담한 현실에 순응할 테니 대신 아무도 열외는 없다는 주장(여성이나 외국인 노동자 혐오)의 형태로 나타난다.

혐오는 정치 프로젝트이다. 정치꾼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죄 없는 소수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든다. 약자끼리 싸우면서 사악한 정치꾼들의 목적에 봉사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세상에서 서로를 미워한다. 언제까지? 더는 그 정치적 목적이 필요 없어질 때까지. 서로 혐오함으로써 누가 뒤에서 미소 짓고 있는지 눈여겨볼 일이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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