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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관용어

opinionX 2019. 2. 14. 11:08

글 쓰는 이에게 관용어의 사용은 대체로 피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다. 사유와 반성을 거치지 않고 습관적으로 구사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용어의 예는 무수히 많겠지만 세간에서 논란이 되었던 표현을 언급하고 싶다. 그중 하나는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인데 보통 부정적이고 희화화된 느낌을 준다. 

좀 오래된 일이기는 하지만 그 지역의 의회에서 이 관용어를 추방하자는 결의서를 채택한 적이 있다. 그 결의서에서 언급되었던 한 선배 소설가가 관용적으로 사용했을 뿐인데 비난받는 게 부당하다면서 투덜대던 게 기억이 난다. 다른 하나는 ‘소설 쓴다’는 말이다. 의도적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경우나 터무니없는 일 등을 가리키는데 그냥 소설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언젠가 온라인에서 청와대 대변인과 소설가 사이에 잠시 다툼이 있었다. 청와대 대변인은 뉴스란 사실에 기반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때 사용된 소설은 거짓말, 왜곡 등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한 소설가가 불쾌하다고 반응했고 청와대 대변인은 관용적 표현일 뿐인데 웬 시비냐고 응수했다. 관용어라 해도 누군가는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고 그런 의도 없이 사용한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을 향한 비난이 부당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삼천포와 관련된 논란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갈 일이 있었다. 내게도 삼천포는 이 표현으로 익숙한 지역이었지 실제로 가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삼천포에 머무는 동안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워서였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글에서나 말에서나 단 한 번도 ‘삼천포로 빠진다’는 표현을 써 본 적이 없다. 이 관용어가 무심코 튀어나오려 해도 내게 깊이 각인되었던 삼천포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스스로 사유하고 반성하며 다른 표현을 찾아내도록 나를 격려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지역 의회에서 이 관용어를 추방하자는 결의서 대신에 ‘우리 동네에 놀러오세요’라는 결의서를 채택했다면 어땠을까. 

청와대 대변인과 소설가의 다툼을 보면서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만약 그 대변인이 소설에 감동받은 적이 있다면, 소설이 그의 내면을 뒤흔들어 언제까지나 멈추지 않는 떨림과 속울음으로 남는 경험을 했더라면, 거짓말을 소설로 치환하는 문장 앞에서 아마도 머뭇거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소설의 관용적 표현이 거슬렸다면 불쾌하다고 투덜대는 것보다 위대한 문학에 고양되어 본 적 없는 쓸쓸한 마음에 아름다운 소설 한 편을 권유하는 게 진정으로 다정한 일이었을 것이다. 

관용어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사유와 반성 없이 관용어를 쓰는 습관에 있다. 

광주를 폄하하고 5·18을 왜곡하는 자들은 예전부터 보아왔으므로 지겹도록 익숙한 자들이다. 그들이 쓰는 말 역시 진부하기 이를 데 없어 하나의 관용어라 해도 좋을 정도다. 그들이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이 낡아빠진 관용어를 진실처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건 혐오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혐오는 나와 다르다고 내가 알지 못한다고 간주하는 것들을 향한다. 혐오를 넘어서려면 나와 다르지 않음을 발견해야 하고 진실로 알아야 한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고 오래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까 광주와 5·18을 왜곡하고 모욕한 자들은 사실 광주와 5·18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고백한 셈이다.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절망과 공포와 굴욕 속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용기를 잃지 않으려 애썼던 사람들의 육성을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왜 아름다운지 왜 그토록 숭고한지 모르는 이유는 그들이 한 번도 민주주의에 감동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모독한 게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것이며 민주주의를 알고 싶지도 않다는 속내를 들킨 것일 뿐이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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