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반 칼럼/문화와 삶

양심

opinionX 2019. 1. 17. 13:59

국방부는 국방백서에서 대체복무제를 둘러싼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용어 대신 종교적 신앙 등에 따른 병역거부자라는 용어를 고수하겠다고 밝혔다. 군에서 병역의무를 이행했거나 이행 중이거나 이행할 사람들이 비양심적인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국민적 우려를 고려했다고 한다. 국방부의 해명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 ‘오해의 가능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주목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해의 여지를 두지 않기 위해 이 용어를 예민하고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러나 ‘오해의 가능성’이란 미묘한 문제이기도 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 문제의 미묘함을 어린 시절에 처음으로 실감했던 듯하다. 대체로 시골집들이 그랬듯이 우리 집에도 욕실이 없었다. 커다란 고무 함지가 나의 욕조였고 거기에 데운 물을 채운 뒤 몸을 담가 때를 불리면 어머니가 때수건으로 박박 밀어주곤 했다.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근 동안에는 즐겁지만 물이 식어 점점 차가워지고 때수건이 지난 자리가 벌겋게 달아오르면 그처럼 고역스러운 일도 없었다. 마음이 널을 뛴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2018년 11월 30일 오전 대구구치소에서 출소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마중 나온 가족과 포옹하고 있다. 법무부는 이날 양심적 병역거부로 실형을 선고받은 이들 중 57명을 가석방했다. 연합뉴스

그러다 언제부턴가 봄이 되면 수돗가에 나무로 틀을 짜서 부엌 벽과 맞닿은 부분을 제외한 삼면을 방수포로 가렸다. 평소에는 활짝 열려 있지만 접어 올린 방수포의 끝자락을 잡아 내리면 담장 밖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가려졌고 겨울이 되기 전까지 거기서 우리 식구는 등물을 하거나 목욕을 했다. 한여름이면 대낮에도 방수포만 내린 채 등물을 했고 그 작고 아늑하며 천장이 없는 터라 답답하지 않은 우리만의 욕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나는 즐거웠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점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절 시골마을에서 사내아이가 알몸도 아니고 그저 웃통을 벗고 등물을 하는 것쯤이야 별일도 아니었던 터라 외려 유난을 떤다는 인상을 줄까 봐 꺼려지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슬쩍 내비치며 부모님께 물었더니 보이는 우리가 수치스러워서가 아니라 우연히 벌거벗은 우리를 본 누군가가 수치스러워하지 않도록 그렇게 한다는 거였다. 나는 이 설명이 인상적이었던 터라 오래 곱씹어 보았고 윤리의 요체 가운데 하나도 이런 형태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수치를 아는 자는 반드시 타인이 느끼게 될 수치를 고려한다는 것. 타인이 수치를 느끼게 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의 수치에만 골몰한다면 윤리적이라 일컬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이를테면 ‘오해의 가능성’은 ‘오해하지 않을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자신의 수치에만 몰두하게 되면 타인의 수치를 무시하게 되는 것처럼. 국방부가 ‘오해의 가능성’만큼 ‘오해하지 않을 가능성’을 예민하고 섬세하게 고려했다면,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에 집착하는 대신 이 용어를 두고 갈등이 생겨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모른 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복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일이 만약 수치스럽다면 왜 그런지 우리는 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군복무를 수행하는 일에 자긍심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방부는 온갖 비리를 척결하여 사병들에게 질 좋은 식사와 보급품을 제공해야 하고 지휘관은 부하를 종처럼 부리는 게 아니라 존중해야 하며 모든 군인은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권리를 부여받아야 한다. 의문사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면 수사 과정부터 투명하게 공개되어 억울한 사람이 없어야 하고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이 병역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관리 감독해야 하며 부당한 청탁이 결코 통용될 수 없게 해야 한다. 마침내 군복무를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국토만을 방위하는 것이 아니라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까지도 보호한다는 자긍심을 지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그들이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이 모든 악조건 속에서 군복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손홍규 소설가>

'일반 칼럼 > 문화와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수동의 재발견  (0) 2019.04.25
관용어  (0) 2019.02.14
이 세계는 어디나 궁지  (0) 2018.12.20
슬픔을 아는 사람  (0) 2018.11.22
사람과 사연  (0) 2018.10.25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