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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일본군 전시 성폭력 생존자이자 인권·평화 운동가였던 김복동 선생께서 93세의 나이로 영면하셨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전쟁, 그리고 그 전쟁에 참전한 남자들은 그의 몸을 강탈하고 강간했다. 살아남아 되돌아온 고국의 독재자는 그의 거대한 상처와 폭력의 기억을 경제차관 몇 푼에 도매금으로 팔아넘겼다. 군부독재가 끝나고 수년이 지나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문제는 3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았고, 대통령이 된 독재자의 딸은 이번에는 외교를 위해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했노라고 선언했다. 납득할 수 없었던 그는 계속해서 싸웠다. 그리고 끝내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 속에서 남은 이들에게 계속 싸워줄 것을 당부하며 숨을 거두었다. 역사의 버거운 상흔들이 고작 하나의 개인이었던 자신에게 몰려드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숨죽이고 가만히 있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여전히 세계 어딘가에서 자행되는 전쟁 성폭력을 규탄하고, 그들에게 힘이 되고자 했다.

국민대학교 평화의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세움' 학생들이 30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어쩌면 그는 자신의 경험 속에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이 폭력의 예사로움을, 광범위함을, 일반성을. 한국에만 국한시켜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전시 강간이 즐비하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도 계엄군에 의한 강간 및 성고문 등이 자행되었음이 드러났다. 국가 단위의 역사는 전쟁을 언제나 승리나 패배의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심지어는 거기에서 어떤 명예를 찾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전쟁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었을 이들에게 주어지는 승리나 명예는 없다. 반면 패배에 대한 대부분의 대가는 바로 이 무관한 자들이 치르게 된다.

오랜 시간 동안 한국 사회가 ‘위안부’를 바라보기 두려워한 것은, 그것이 이 사회, 무엇보다도 남자들을 비추는 거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민족이라는 이름의 흐릿한 필터를 들지 않으면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없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상당부분 ‘약소국의 설움’에 머물러있다. ‘우리’가 힘이 약해서 ‘누이’들을 지키지 못했고, ‘우리’는 여전히 힘이 약해 강대국인 일본에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계관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 겪어서는 안될 일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공감과 분노가 아니라, 힘이 약한 ‘나’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울분이다.

이것은 민족의 설움 같은 것이 아니라,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일본 군인만 저지르는 악행이 아니라, 지금도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성들의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이고, 모든 배경과 이유는 뒤로 물러나야 마땅한 것이다.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비분강개하는 남성들의 수와 모든 강간과 성폭력이 그 자체로 악이고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남자들의 수는 왜 이렇게나 차이가 날까? 왜 일본이 저지르면 악이지만 동포가 저지르는 성폭력은 ‘꽃뱀일 수도 있는’ 문제일까?

때때로 나는 온라인상에 그 많은 남성들이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이 ‘정당한 성폭력이 존재한다’는 아닌지 고민한다. 하지만 그 어떤 행위에 대한 처벌도 강간일 수는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처벌하는 것은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에 정당한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함이지, 처벌하는 자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폭력에 대한 반대가 없는 ‘미안함’은 그저 남자의 얼굴을 한 ‘민족’에 바치는, 그마저도 자기 자신을 위한 한 조각의 공명심일 뿐이다.

지하철에서 술에 취해 벌건 얼굴로 여자에게 술 먹이는 법을 떠벌이던 어떤 남자가 떠오른다. 김복동 선생이 일생을 걸쳐서 원한 것은 정의였다. 우리가 고인의 명복을 빌 수 있을 만큼은 정의로울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한국,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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