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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원래 이번 주 초에 쓰여졌다. 제목도 ‘유승민의 의미’, ‘유승민과 윤리’ 등 여러 차례 바뀌었다. 결국 지금 나는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1위 ‘유승민’과 함께 “원내대표직 사퇴, 의총 권고 수용” 뉴스를 읽고 다시 쓴다. ‘밤새 몸으로 둑의 붕괴를 막았던 네덜란드 소년’처럼 버티던 유승민 원내대표는 동화와는 달리 ‘마을 사람에 의해 쫓겨났다’.
최근 새누리당 사태와 유 원내대표의 행보는 “이 시대 한국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배신 트라우마’. 그녀는 무조건 충성, 영원한 사랑, 변치 않는 믿음을 요구한다. 이런 태도는 옳고 그름을 떠나, 일단 불가능한데 새누리당은 이 불가능한 임무를 해냈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하나는 내가 지난 6개월간 직접 겪은 일이다. 트위터 여론조작과 매스컴을 십분 활용, 진보 인사로 불리는 이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지지하는 것이 양심과 진보의 증거로 생각했고, ‘셀럽(유명인사)’인 양 떼로 몰려다녔다. 하지만 실상은 타락이라는 말도 부적합할 정도로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가까운 지인들조차 “돌이킬 수 없는 사악”이라고 묘사했다. 많은 이들이 ‘멘붕’에 빠졌다. 나도 나름의 선의와 약간의 책무감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발언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 와중에 관계자들이 “선생님(나)은 겨우 몇 주 부추겼지만, 저희들은 6년 동안 그를 영웅으로 포장해 온 죄인입니다. 집단적으로 자성하고 있습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이 말은 위로가 됐지만 시류와 대세, 겉모습에 쉽게 흔들리는 나 자신을 용서하는 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다른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는 멕시코 배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일화다. <줄리아를 꿈꾸며>(2003)라는 영화를 촬영할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영화는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찍었고 배우와 스태프 모두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다.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 하비 카이틀(미국 배우)뿐인데 우리는 모두 영어를 사용했다”며 분노했다. 미국 배우가 “영어가 아니면 일하지 않겠다”고 요구한 것도 아닌데, 왜 모두들 자연스럽게 미국인의 조건에 맞춘 것일까.
노동자의 생존 투쟁을 개인의 출세 도구로 주도면밀하게 이용한 운동가와 그의 온갖 비행을 알면서도 은폐하는 진보 진영, 미국인을 알아서 배려해 주는 ‘제3세계’ 사람들 덕분에 맘껏 말의 자유를 누린 영어권 배우. 박 대통령의 경우와 같은 ‘급’에서 비교할 만한 사례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공통점은 “상사가 좋아하는 메뉴로 통일”하는 일상생활부터 국정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때문에 원칙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이다. 독재와는 다르다. 독재는 나름 지향이 있고, 이에 따른 대중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개발독재가 대표적인 현상이다. 지금 대통령의 상태를 가장 우아하게 표현한다면, 동물의 왕국에 사는 세금 횡령 공무원이다. 무능, 무책임이라는 말도 진부하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몰라도 국민은 ‘선거의 여왕’이 아니라 ‘대통령’을 뽑았다.
누구나 눈치를 보고 산다. 미국 대통령도 여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불가피하게 약자의 처지에서 눈치를 봐야 한다면, 치열한 고뇌 끝의 선택이어야 한다. 아세(阿世)는 자신의 이해와 “세상 이치” 사이에서 매 순간 협상해야 하는 힘겨운 일이다. 최소한 오버는 하지 않겠다는 자기 다짐이 필요하다. 알아서 먼저 엎드릴 필요는 없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의 아우라, 동일시 욕망 때문에 안해도 될 ‘짓’까지 하게 된다. 이것은 정치권만의 이슈가 아니다. 권력과의 대면을 피할 수 없는 인생사에서 모든 이들의 고민거리다.
유 원내대표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래서 중요했다. 그의 소신은 상식이었지만, 지지율 30% 이하의 대통령에게 의회를 갖다 바치는 한국사회에서는 정치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결단이었다. 무조건적 충성?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관계 자체가 조건의 산물이다.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것, 이것이 ‘조건의(conditional)’ 의미다. “무조건”은 공포로 정신이 나간, 판단 불능 상태다.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심리치료사가 아니다. 어차피 그녀의 ‘트라우마’에는 답이 없다.
유 원내대표를 응원했던 국민은 힘이 빠졌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친박’을 비롯, 새누리당 의원들은 ‘제2의 차지철’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통치자의 생떼에 응하지 않는 것. 이는 대통령의 자질 문제를 넘어 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기본 윤리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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