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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성기는 스피커의 북한말이라고 한다. 원래의 소리보다 크게 하는 것이므로 확성기(擴聲器·loudspeaker)가 맞지만 북한에서는 그냥 스피커만으로도 ‘확성’이라고 생각하나보다. 확성기가 물리전이 아니라 심리전이라면 설득과 혼란에 그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확성기 기능은 짜증과 일상 방해인 듯하다. 2004년, 6·15 남북 공동선언 후속으로 이어진 남북 장관급 회담을 총지휘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당시 북한은 대북 확성기 방송에 대해 공식적으론 체제 비방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단지 최전방 접경지역 학생들이 공부를 하거나 주민들이 수면을 취하지 못해 고통이 극심하다는 사정을 계속 말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 8월 국방부가 확성기 중단 합의 이후에도 기기 노후와 유지 보수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봐서, 완전히 종식된 사안은 아닌 듯하다.
소리는 읽기, 말하기와 달리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다중이 동시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매우 강력한 ‘소통’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확성기는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근대의 상징이다. 기술과 계몽과 선전.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방식 자체에 변화가 왔다. 최대한 많은 이들이 일방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바, 선택하지 않은 일정 이상의 데시벨은 고역이다. 그 내용이 대북 방송 중 하나인 ‘소녀시대’의 노래든, 선거운동 방송이든, 버스 안에서 목소리 큰 사람의 전화 통화든 반가운 사람은 없다. 다세대 주택의 층간소음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이다. 도시의 소음이 주는 피로감 때문에 서민들은 집을 구할 때 “(비교적 조용하지만) 먼지 많은 곳이 나을까, 시끄러운 곳이 나을까” 고민한다. 소음은 일상의 정치다.
지난해 서울시 각 구별 확성기 소음 민원 건수_경향DB
나는 이번 기회에 박근혜 정부가 평화와 화해의 정권으로 거듭나서 역사에 길이 남기를 바란다. 소리에 대한 획기적인 국가정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일단 확성기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 정부가 북한에 하고 싶은 말을 우리 내부의 ‘공공의 적’에게 하는 것이다. 고액 체납자, ‘갑’ 행동주의자, 불공정 행위를 일삼는 대기업 등 그런 이들은 줄섰다. 이들은 여론의 압력이나 사법 처리 전까지는 남의 말에 귀를 막고 사는 집단이다.
둘째, 강력한 소음(消音)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다.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소음을 환경 공해, 인권 침해로 규정하는 것이다. 축구장의 열광과 콘서트장의 환호, 욕설과 혐오 발화, 심야의 술주정 등은 모두 소리지만 그 의미가 다르다. 이런 소리들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고민하고 분류하고 규제하는 것이다. 물론 현행법으로도 가능하지만 그 이상이 필요하다.
남측의 라디오 방송과 전단 및 물품 살포와 북측의 확성기 타격 선포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싸움이 아니라 양측 정권의 전쟁이다. 북한에 하고 싶은 말은 고위급 회담이나 민간 교류를 통해서 하고, 진짜 대화는 우리 사회 내부에서 활발해야 한다.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 내용이 좋으면 사람들은 작은 소리라도 찾아 듣는다. 정부와 국민 간의 유체이탈 화법이나 배신 트라우마 드라마, “네 탓이오” 말고,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수준의 대화만이라도 간절하다. 확성(確聲)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소통만 한 치유는 없다. 세월호처럼 국민의 절규는 외면하면서 다른 이(북한)에게 흥겨운 노래를 들려주고 체제를 비방하는 것은 국가안보가 명분이라 해도 좀 이상한 행동 아닌가.
말할 것도 없이 분단 체제가 통치 집단에 영원한 구원인 이유는, 내부 문제를 언제든지 딴 곳으로 돌려서 정권의 위기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엉뚱한 곳에서 “불이야!”를 외치는 것은 국민을 준전시 상태 심리로 몰아넣는 것이다. 견제사격(牽制射擊)의 목표가 ‘외부의 적’이 아니라 국민이라니. 계속 ‘사격’(방송)을 지속한다? “총알이 아깝다”는 이때 하는 말이 아닐까.
전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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