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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근 ‘메르스와 군사주의’를 주제로 모 월간지에 원고지 27장 분량의 글을 썼다. 내용 중에 “인간이 처음 배운 언어가 짐승의 발자국이라면, 몸은 첫 번째 인식 도구였다”는 글귀가 있는데 앞부분은 소설가 정찬의 최근작 <길, 저쪽>에서 따온 것이다(“인간이 본 최초의 언어가 무언지 아나?”, “짐승의 발자국이었어”, 17쪽). 표절이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소설가 정찬의 표현에 의하면”이라고 표기했어야 한다.

작가에게 늦은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이 한마디면 끝일까. 법적, 사회적으로 나의 잘못은 어디까지인가. 나는 그 표현에 대한 욕망이 있었고 훔쳤고, 내내 괴로웠다. 그런 면에서 논문은 편리한 점이 있다. 남의 글을 대거 옮긴 후 출전만 밝히면 표절이 아니게 된다(이런 글이 ‘짜깁기’다). 학계에는 “한 문장에 똑같은 단어가 몇 개 이상 들어간 경우” 등의 규정이 있다. 일부 학위 논문이나 학회지에 실린 글 중에는, 다른 이의 글에서 전체 골격을 그대로 가져오고 단어만 교체한 글들이 있다. 논문은 새로운 공식을 만드는 예술이다. ‘구조 표절’은 기존의 틀에 대입, 단어만 바꾸어 쓰는 것이다. 요지는, 표절을 같은 단어에 집착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기야 문대성씨처럼, 이런 표절조차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예 다운로드하는 경우도 있다.

문학에서 표절 문제는 훨씬 애매한 이슈이다. 나는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보다 글의 구조나 문체의 유사성이 더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글쓴이의 이름을 가리면 필자 불명인 무색무취의 글은 형식상 표절은 아니지만 똑같은 구절만 아니면 오케이인가. 신경숙씨의 경우도 그가 아주 독특한 문체의 소유자라면 다른 작가의 문장을 갖다 썼다 해도, 표절 논란은 없었을 것이다.

신경숙씨의 일부 작품 표절과 문단에서 그들 부부의 권력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나 같은 일반 독자도 10년이 훨씬 넘도록 들어온 이야기다. 특히 그간 ‘남진우 교수, 남진우 편집위원’이 특정 작가를 타기팅, 비난해온 행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표절논란 소설가 신경슥_경향DB



이번 사태에 대해 “여론 재판, 과도한 징벌”(윤지관)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앞뒤가 바뀐 사고방식이다. ‘여론 재판’은 문제가 아니라 결과다. ‘신경숙급’ 인사의 뉴스는 여파가 크다. 현실 진단도 틀렸지만 나는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여론 재판’이라는 틀에 박힌 분석이 더 싫다. 지성의 반대는 무식이 아니라 상투성이다. 이미 이 문제를 보는 시각이 없다는 얘기다.

독자는 작가나 출판사보다 성숙하다. 나를 포함, 독자들은 이번 사태로 모든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사실 창비는 ‘절대 권력’만큼이나 ‘절대 역할’을 해왔다. 창비는 대중작가의 작품 수익으로 학계의 비판적인 저널인 ‘안과 밖’(영미문학연구회)이나 ‘여성과 사회’ 등을 지원해왔다. 운영이 어려운 계간지(창작과비평)가 거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원래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탄식의 뜻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이 속담은 합리적이다 못해 급진적인 말이 되었다. 외양간을 안 고치기 때문이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문제는 사고 자체보다(사고는 과거이므로), 이후 대응이다. 대응이 더 큰 사고, 더 큰 문제다. 처음부터 “인정한다” 아니면 최소한 “검토하고 입장을 밝히겠다”고 했다면 ‘여론 재판’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그러나 창비와 작가회의 일부 책임자의 발언은 분노를 넘어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신경숙 작품이 더 낫다”, “필사를 하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 이들은 기본적으로 ‘문학과 지성’이 없구나.

가장 압권은 “어떻게 키운 작가인데”, “노벨상 후보에 흠집” 운운하는 논리다. 노벨상 콤플렉스도 창피하지만 한국이 노벨 문학상을 못 탄 것은 바로 작가를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다. 왜 노벨상이 그 국가의 주류 중의 주류, 대표 중의 대표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할까. 노벨상 정치는 복잡하다.

그러나 최소한 음악으로 치자면 ‘이지 리스닝’ 계열의 작가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노벨상이 한 사회의 문화적 축적이라고 가정하면 그리고 그토록 욕망한다면, 베스트셀러 작가 한 명이 아니라 자기 공동체에 문제의식을 가진 수백 명의 ‘이응준’(그도 문단 경력 25년의 뛰어난 중견 작가다)이 포진해 있을 때 가능하다.

말할 것도 없이 이번 사건은 시스템과 작가가 선택한 결과이다. 그녀는 결혼제도와 출판권력 등 공사 영역에 걸친 절대적 보호 아래, 자신과 직면할 수 없게 된 거대한 바위가 되었다. 당황한 나머지 변명조차 자기 언어가 없었다. 문단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거대한 바위가 아니라 ‘거대한 뿌리’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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