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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수업〉의 저자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오랜 호스피스 활동을 통해 죽음에 대한 많은 연구를 남겼다. 그녀는 죽음 직전의 환자들이 보여준 근사(近死) 체험, 육체의 이탈 현상을 보고했다. 영어 표현도 상황 그대로다. 영혼이 육체를 벗어난 상태(Out of Body Experience), 줄여서 ‘OBE’라고 한다. 많은 이들이 수술 중에 육체이탈을 경험하며 의식불명 상태에서도 타인의 말을 알아듣는다.

요즘 회자되는 ‘유체이탈(遺體離脫) 화법’의 유체는, 부모가 물러준 자기 몸을 뜻한다. 유체이탈, 육체이탈, 정신의 체외이탈. 같은 말이다.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느냐.” 일상에서 많이 쓰고 듣는 말이자 실재하는 과학 현상이다. 주로 극도의 스트레스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 임종을 앞둔 이들의 임사(臨死) 체험을 말한다. 최근에는 심폐 소생술의 발달로 사후 세계를 경험한 이들의 사례가 증가했다고 한다.

육체이탈에 대한 가장 철학적이며 윤리적 질문은 프랑스·캐나다 합작 영화 <마터스(순교자, 2008)>일 것이다. 돈 많은 이들이 죽음의 공포와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어한다. 그 방식은 타인을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고 “사후 세계가 어땠냐”고 묻는(것처럼 보인)다. 자신은 참여하지 않는 죽음의 대리 경험. 돈으로 타인의 고통을 사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만큼 자본주의의 인간성 종말을 그린 텍스트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이처럼 육체이탈의 당사자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극심한 고통을 체험한다. 반대로, 박근혜 대통령의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은 자기 고통이 아니다. 대화 중 혼자 맘대로 자리를 떠나 돌아다니다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난다. 자기 책임을 남 일처럼 말하고 비판하고 문책한다. “나는 아니니까 당신들 잘못”이라는 논리다. 국민에게 자기 문제를 대리 체험케 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18일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국전 참전용사 가족 초청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차라리 멱살잡이가 낫다. 이런 대화법처럼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일도 없다. 박 대통령이 대중화(?)시키긴 했으나 그가 처음은 아니다. <삼성을 생각한다>의 김용철 변호사 사건 때 이건희씨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너무 쉽게 한다”고 호소했다. 후안(厚顔) 캐릭터의 전형인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자주 사용했다. 사회지도자나 국정 책임자의 이런 발화 방식은 국민의 정신 건강에 치명적이다.

앞서 강조한 대로 ‘유체이탈’과 ‘유체이탈 화법’은 반대 현상이다. 전자는 본인의 고통이지만, 후자는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이들과 공동생활은 한계가 있다. 이 상황이 계속되면 ‘나쁜’ 사람에 의해 보통 사람이 병에 걸리게 된다. 이 화법은 상대방이 없다. 상호 격투나 논쟁이 아니어서 처음부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두 개 이상의 인격을 가진 ‘가해자’는 전혀 손상이 없다. 유체이탈 화법은 유체(幽體) 이탈이다. 유령 인격, 복수(複數)의 인격이 외출하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의 ‘이탈’은 외교의 형식을 띤다. 나라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외국에 나간다, 몸살을 앓는다, 선거 전날 ‘연약한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뜬금없는 담화를 발표한다. 사람들은 어이없음, 정치 불신, 정신 붕괴에 빠진다. 국민들은 스트레스를 받고 정치를 포기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스트레스 단계인지 포기 단계인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그마저도 생각이 없는 것일까. 인간관계에서 불성실과 딴청처럼 효과적인 억압은 없다. 상대가 스스로 미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몸은 유체이탈 화법을 사용하기에 최적화된 듯 보인다. 살아 있는 사회적 몸(mindful body)이 아니다. 간혹 얼굴이 굳을 때도 있지만 대개 그의 몸은 식사도 하지 않고 머리 모양 때문에 잠도 자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마네킹? 사이보그? 더미(dummy, 인체 모형)라는 이들도 있다. 대화를 회피, 거부하는 것을 넘어 몸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2015년 5월 8일 (출처 : 경향DB)


외국의 여성 지도자들을 떠올려보면 쉽게 비교가 된다. 마거릿 대처, 힐러리 클린턴, 앙겔라 메르켈, 콘돌리자 라이스, 심지어 이멜다와도 다르다. 이들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 공적인 자아로서 강단과 감수성, 자기주장이 있다. 대중과 혼연(渾然)된, 자연스럽게 사회화된 몸이다.

유체이탈 화법은 소통 무능처럼 보이지만 실제 인식론적 기반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안하무인이다. 유체이탈의 다음 단계는 유령. 최근 출간된 정찬의 장편소설 <길, 저쪽>은 유신 시대의 고문, 특히 여성에 대한 집단폭력을 다룬다. 대중이 독재에 ‘동의한’ 무서운 시대였다. 내가 유신 시절을 제대로 겪지 않아서일까. 나는 ‘아버지’의 정치보다 ‘딸’의 정치 이탈이 더 공포스럽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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