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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경향시선

귀가

opinionX 2019. 11. 18. 10:34

날 추워지니

쓸쓸한 짐승이 자꾸 기어 나온다

음식 쓰레기 버리러 가면

검은 길고양이 얼어붙은 채 서 있고

나는 겨울이 싫은 거다

오직 생계만 남은 생계가 두려운 게다

그래도 가끔 밥 한술 나눌 친구들이 있어

외투도 없이 술 취한 거리에서

막차를 기다리며 서 있는 거다

시간은 얼음벽을 지나가고

하필이면 누추한 계절에 실직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막막하게 눈물이 솟는 게다

차창 밖으로 눈발 쏟아지는 꿈을 꾸다

문득 깨어보면 버스는 어느새 종점에 와 있고

나는 길고양이들이 서럽게 우는 것이 무서워

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발소리를 죽이는 거다

어디 빈 우체통 속에라도 들어가 오는 소식들을 듣고 싶은 게다

삭풍처럼 야위는 시간에 빈 잎사귀라도 달고 싶은 것이다


오민석(1958~)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어느덧 추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한기가 돈다. 시인은 생활의 곳곳에서 이 추위를 발견한다. 마음속에는 쓸쓸함이라는 웅크린 짐승이 살고, 집 주변 길고양이는 한곳에 고드름처럼 얼어붙어 있다. 살아나갈, 살아남을 방도만을 찾는 계절이 겨울이다. 시인은 또 어느 날 실직한 친구를 만나 막막한 사연을 듣고 눈물을 쏟는다. 삭풍의 시간인 겨울은 일상을 문득 막다른 종점에 내려놓기도 한다.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면 ‘한월(寒月)’을 생각한다. 겨울의 달은 마냥 차가워 보인다. 달은 본래 밝고 깨끗한 빛이지만 우리의 처지가 한파 속에 있는 까닭에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동천(冬天)에 높게 솟은 한월을 정신의 높이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한다. 서리가 내리는 밤의 차가워 보이는 달처럼, 상월(霜月)처럼 매섭고 곧은 정신은 추위의 시간에 구속되지 않는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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