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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연락 없이 늦는 중학생 딸을 기다리며 서 있던 골목을 얘기했다. 온종일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의 한숨과 무거운 발걸음이 진득거리던 어두운 골목 끝에 딸이 나타났을 때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아이가 사뿐사뿐 자신에게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걱정이 사라져서 혼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두 자식을 키우면서 크게 소리 내어 혼낸 적이 없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바라볼 뿐. 그는 자신이 한 일이라곤 한눈팔지 않고 잘 바라본 것뿐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크고 더는 자신의 손이 필요 없을 때, 그가 시작한 일은 유적지 문화 해설가였다. 팔각으로 된 외목도리에 서까래를 걸어 지붕을 팔각으로 꾸민 정자에서 봄을 바라보고 돌담을 거닐며 가을을 맞이하던 시절, 그는 바라보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얘기하곤 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나이 서른이 넘은 아들이 며칠 전 혼례를 올렸다고 했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가족들만 모여 조촐하게 결혼식을 치렀다는 그는 신부의 고운 자태를 얘기했다. 며느리가 아들을 데려가 살아준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며느리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말에는 죄다 고개를 내저었다. 며느리가 살아온 행적도, 며느리의 직장도 하물며 며느리의 전화번호도 모른다고 했다. 아직 딱히 연락할 일이 없으니 알 필요가 없었다는 그는 언젠가 며느리가 초대하면 그때야 신혼집에 가볼 거라고 했다. 둘이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자신은 그저 부를 때만 가주면 된다는 것이다. 예사롭지 않은 이 시어머니는 시쳇말로 ‘시월드’라 부르는 구태의연한 세상을 구축하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의 거리 두기는 무관심이 아니다. 그의 삶을 되돌아볼 때 그의 거리 두기는 ‘멀리서 바라보기’다. 자식들에게 그랬듯이, 고궁을 알아갈 때 그랬듯이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들을 응시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며 예쁜 모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그들의 모습 그대로 봐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거리 두기는 따뜻하고 여유롭다. 나도 그처럼 나이 들고 싶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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