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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시간에 인류가 발명한 가장 놀라운 세 가지 제도는 가족·시장·민주주의라고 말하곤 한다.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고, 먹고살아야 하며, 공동의 의사 결정을 이끌어내야 하는 존재다. 이러한 요구들에 부응해 등장한 사회 제도가 가족·시장·민주주의라는 의미다. 이 세 제도는 사회학·경제학·정치학의 핵심 탐구 대상이기도 하다.

주목할 것은 이 세 제도에서 고정적 모델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가족·시장·민주주의는 끝없이 변화돼 왔고, 여전히 변화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 예컨대, 1인 가구의 증가와 금융시장의 지구화는 전후 시대에 가족과 시장 영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다. 이러한 변동이 암시하는 것은, 가족과 시장에 대한 표준화된 모델이 없고,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지속적으로 일궈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의 경우는 어떨까. 지난 20세기 민주주의의 역사에는 두 가지 ‘결정적 모멘트’가 존재했다. 민주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파시즘과 싸워 이겼고, 동구사회주의 몰락에서 볼 수 있듯 공산주의와의 경쟁에서 승리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도도한 물결을 지켜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인류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역사의 종착역에 도달했다는 과감한 주장을 내놓았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제도다. 평생 민주주의를 탐구한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가 전제정치의 방지, 본질적 권리들, 일반적 자유, 자기 결정, 도덕적 자율성, 인간 개발, 개인적 이익의 보호, 정치적 평등과 같은 소망스러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분석했다. 더하여, 그는 현대 민주주의가 평화의 추구 및 번영이라는 결과까지도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달이 이러한 견해를 제시한 때가 1990년대 후반이었으니 민주주의에 대한 낙관론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앞세운 정치제도가 정말 인류에게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을 선사해온 걸까. 21세기가 열린 지 10년이 지난 후, 파커 파머는 우리 시대 정치가 행복이 아니라 비통을 안겨준다고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정치는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절박한 인간적 요구를 무시한 채 편리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민주주의와 공공선에 기여해야 할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 우리 시대의 정치는 ‘비통한 자들의 정치’라는 게 그의 우울한 진단이었다.

21세기가 열린 지 20년이 가까워지는 현재,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낙관론보다 비관론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 비관적 전망의 한가운데는 미국의 ‘트럼프 현상’과 유럽 극우 정당들의 약진에 이르는 포퓰리즘의 발흥이 놓여 있다.

민주주의에 관심을 두는 이들은 지금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올 한 해 민주주의 담론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책의 하나는 야스차 뭉크의 <위험한 민주주의>다. 원제목은 ‘국민 대 민주주의’(The People Vs. Democracy)다. 뭉크는 최근 서구 정치가 ‘포퓰리즘의 모멘트’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가 맞이한 세 번째 모멘트인 셈이다.

뭉크는 1990년대 이후 지배적 정치 패러다임으로 군림해온 자유민주주의가 일대 위기에 직면했다고 진단한다. 위기는 두 가지 형태를 띤다. 포퓰리즘을 등에 업고 ‘권위주의적 스트롱맨’이 독재로 나가는 ‘권리 보장 없는 민주주의’가 하나라면, 테크노크라트의 과두제가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민주주의 없는 권리 보장’이 다른 하나다. 내 시선을 잡아끈 건 민주주의 붕괴 경향에 대한 뭉크의 관찰이다. 구체적으로 기성 정치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넘어선 혐오, 소셜 미디어에서 강화되는 극단적 진영 논리,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가짜 뉴스에 대한 뭉크의 분석은 우리 사회에도 안겨주는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흥미로운 건 뭉크가 한국을 직접 다룬다는 점이다. 뭉크는 한국이 촛불집회를 통해 권위주의로의 후퇴를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켰다고 평가한다.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지도자를 거부하고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사수하려는 게 촛불집회의 원동력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내건 20대 국정전략의 첫 번째도 ‘국민주권의 촛불민주주의 실현’이다.

내가 품고 있는 물음은 한국 민주주의가, 뭉크의 표현을 빌리면, 현재 위험하지 않은가의 질문이다. 앞서 말한 정치사회 혐오, 극단적인 이분법, 넘치는 가짜 뉴스가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정직한 현실이다. 민주주의가 쉽게 붕괴할 것이라고 믿진 않는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언제나 전진하는 것은 아니다. 촛불집회 2년을 맞이하는 현재,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다시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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