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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바닷바람 탓일 것이다. 작은 항구를 에두르고 있는 나지막한 산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진달래는 아직 피지 못했고, 개나리도 보이지 않았다. 내달리는 차를 타고 지나쳐온 온 산이 불긋불긋 봄빛으로 물들어 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항구로 걸어가는 길은 자갈이 나뒹굴며 흙먼지가 일었다. 도시 한복판 두꺼운 보도블록 틈새로도 민들레를 피워내는 봄이 이곳에는 닿지 않았다.
그러니 봄 구경이 아니었다. 양산을 펼친 할머니가, 선글라스를 낀 아주머니가, 배낭을 멘 아저씨가, 조잘조잘 떠드는 학생들이 줄지어 항구로 걸어가는 것은 봄볕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선착장을 걸으면서 한쪽 벽에 길게 이어 붙인 타일들을 내려다봤다. 간절한 바람과 아픔을 적은 글귀를 읽다가 드문드문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바다를 바라봤다.
어떤 이들은 간절한 바람을 적은 현수막 앞에 멈춰 섰다. 할머니 한 분은 아이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지어 먹이고 싶다는 글 앞에서 한참 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밥 한 끼가 어떤 마음인지, 그 마음을 헤아린 사람들은 눈시울이 붉어져 애먼 봄바람을 탓했다. 바람 부는 선착장을 휘적휘적 걸으면서 사람들은 자꾸 되새기게 될 것이다. 이곳에 온다고 한들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처참한 아픔을 품고 있던 배도 이제 이곳을 떠났다는 것을. 그러니 이곳은 난바다에 흩어져 있는 작은 섬들로 떠나고 돌아오는 배들이 닻을 내리고 올리는 항구일 뿐이라고.
그런데도 이곳에 올 수밖에 없는 것은 아직 아픔이, 슬픔이 사그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이 아픈 기억은 팽목항 ‘기억의 벽’에 새겨진 수많은 이들의 마음이 가뭇없게 지워지는 날이 되어서야 헤실바실 사라질지 모른다. 그날이 올 때까지는 이곳은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지 않아야 할 기억의 항구로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우린 왜 이런 아픔을 겪게 되었는지 되돌아보지 않을까.
선착장 옆 분향소에서 만난 앳된 청년은 오랫동안 미동도 없이 고인들의 영정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한참 뒤에 가만가만 몸을 움직인 청년은 방명록에 ‘죄송합니다’라고 적었다. 그 말을 적은 청년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죄송해하지 않아도 될 청년의 그 한 마디가 자꾸 마음을 찔러댔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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