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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칼럼에서 나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정치변동을 살펴봤다. 정치적 포퓰리즘 시대의 개막이 그 변동의 핵심을 이뤘다. 그렇다면 사회·문화 변동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사회·문화가 갖는 다양성을 고려할 때, 지난 10년 동안 지구적 차원에서 진행된 그 변동의 추세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서구사회를 위시해 대다수 나라들을 관통하는 두 가지 경향을 주목할 수 있다.

하나는 ‘지구 문화’가 쇠퇴하고 민족주의가 강화돼 왔다는 점이다. 지구 문화란 1980년대 이후 세계화의 진전과 함께 ‘글로벌 스탠더드’를 부각시킨 문화적 경향을 지칭한다. 지구 문화의 다른 이름이 ‘미국 문화’였다. 금융위기는 이 글로벌 스탠더드와 미국 문화가 누려온 지구적 헤게모니에 타격을 가했다. 그 대신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과 세계화에 맞서는 민족주의에 힘을 불어넣었다. 2011년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로 시작된 ‘점령(Occupy) 시위’의 확산과 우파에서 좌파에 이르는 포퓰리즘의 부상은 대표적 사례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경제위기로부터 촉발된 불만과 불안이 내면화돼 왔다는 점이다. 금융위기 이후 특히 서구의 사회·문화는 1970년대 후반 영국의 ‘불만의 겨울’과 닮아 있었다. 위기의 경제, 무능한 정치,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에 빠진 사회가 불만의 겨울이 보여준 풍경이었다. 신자유주의에서 포스트신자유주의로 가는 전환기의 불확실성과 통제 불가능성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명명한 ‘유동하는 공포’를 유포시켰다. 삶의 위험을 어디서나 만나지만 그 정체를 제대로 알기 어렵고 그 결과에 올바로 대응할 수 없다는 불안의 내면화 및 구조화가 유동하는 공포의 중핵을 이뤄 왔다.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4년이 지난 2012년,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스, 물리학자 주앙 카라사, 언론학자 구스타보 카르도소는 경제위기가 가져온 사회·문화 변동을 ‘여파: 경제위기의 문화’에서 분석한 바 있다. 이들에 따르면, 금융위기 이후 사회적 저항은 빈발하고, 포퓰리즘 정책이 분출하며, 방어적 개인주의 문화가 외국인 혐오와 인종주의를 부채질해 왔다. 또, 타자에 대한 적대감이 확산되는 가운데 사회적 네트워크는 장애에 부딪히고, 정부와 국민 간의 거리가 멀어져 왔다. 이 과정에서 두려움의 문화가 번져 나가는 동시에 대안적 문화 또한 등장해 왔다는 게 이들의 진단이다. 요컨대, 불안이 지배하는 문화와 대안을 추구하는 문화가 혼돈스럽게 공존하는 게 금융위기 이후 10년의 사회·문화 풍경인 셈이다.

상반된 경향의 기이한 공존은 개인적 차원에서도 관찰됐다. 정보사회의 진전으로 등장한, 마누엘 카스텔스가 명명한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는 금융위기 이후 사회·문화 변동을 독해할 수 있는 키워드다.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는 개인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와 네트워크를 중시하는 ‘부족주의’의 공존을 강화시켰다. 예를 들어, 혼자만의 생활을 즐기는 개인주의가 증대하는 과정 속에서 문화적 취향에서 사회적 혐오에 이르는 부족주의가 동시에 번성해온 시대가 지난 10년이었다. 과잉화된 연결 속에서 자아는 정작 고독에 유폐되는 모순적 경향은 금융위기 이후 10년의 또 하나의 사회·문화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그 일차적 원인을 경제위기에서 찾을 수 있는 사회·문화 변동에서 ‘정체성 정치’가 점점 더 중요해져 왔다는 점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영향력 상실, 불안의 내면화와 구조화,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의 등장 등은 정체성 정치를 활성화시키고 또 강화시켰다. 사회학자 크레이그 캘훈이 강조하듯, 정체성은 개인에게 의미의 근원을 이룬다. 실존적 자아에 사회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정체성 정치는 유동하는 공포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유효한 무기를 제공했다. 금융위기 이후 어느 나라든 목격할 수 있는 포퓰리즘과 페미니즘의 분출은 강요된 세계화로 상실한 국가의 존재와 신보수적 가부장제로 훼손된 여성의 권리를 복구하고 확장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금융위기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난 현재, 지구적 사회·문화는 낙관보다 비관으로 채색돼 있다. 비관의 근원은 사회 시스템의 통제 불가능성과 예측 불가능성이 안겨주는 일상화된 불안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까지 알고 있던 세계가 종언을 고하고 낯선 세계가 열리고 있는데, 인류는 이 새로운 세계를 판독할 지도를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비관주의에 당당히 맞설 출발점은 금융위기 이후 변동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 사회·문화 변동을 과장할 필요도 없지만 과소평가해서도 안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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