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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 조각가 프랑수아 르무안(1688~1737)의 작품처럼 ‘진실을 구하는 것은 시간’이다. 진실의 신 베리타스는 무지와 거짓, 기만과 계략의 신들에 사로잡혀 있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를 만나서야 비로소 베리타스는 장막을 벗는다. 하지만 신화와는 달리 역사에서 시간은 신이 아니고 무심히 강물처럼 흘러오지도 않는다. 거짓과 계략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크로노스가 되어야 비로소 진실이 드러난다. 그들이 몸을 던질수록 시간은 움직였고 마침내 진실이 드러났다. 역사는 그렇게 진보했다.

지난 6월10일 문재인 대통령은 ‘6·10 민주항쟁’ 31주년 기념사에서 그런 진실의 순간과 공간을 기억하자고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되살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므로 고문살해의 현장인 ‘남영동 대공분실’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문 대통령의 ‘민주인권기념관 조성’ 선언과 ‘정부의 적극 지원’ 확약은 너무 반가우면서도 조심스럽다. 문 대통령도 강조했듯, ‘민주인권기념관’ 건립 결정은 정부의 일방적인 선언이나 당파적인 숙원이 아니라 민주주의 심화를 바라는 정치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일이며 시민사회의 노력 끝에 이루어낸 결과다. 살해 현장과 야만의 공간을 민주주의의 기억의 장소이자 인권의 거점으로 만드는 것으로 ‘남영동’은 ‘제2의 역사’가 시작된다. 박종철기념사업회가 강조했듯이,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독재의 발톱이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를 드러내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국가권력의 인권유린은 우리 사회의 중심에서 발생했고 무심한 일상적 삶과 공존했음을 그대로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그 처절한 고통과 공포, 기괴함과 당혹함을 어떻게 ‘민주인권기념’으로 승화시킬지에 대해 모두들 조심스러워 해야 한다. 특히 지난 두 권력자들의 역사 유린과 악용을 기억한다면, 정치가들과 권력기관은 역사기념관 건립과 운용에 겸손하고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이명박·박근혜 두 정권이 역사를 권력의 전리품이자 노리개로 삼은 것에 대항했다. 부디,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역사정책 결정과 기억문화 창출의 ‘과정’을 보여주자.

공공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재현과 기념은 무엇보다 민주적 공공성과 전문성에 기초해야 한다. 다원주의와 개방성에 기초해 장기간의 숙의와 다차원적인 검토 및 비판적 수정 과정이 필요하다. 정치권력이 달라졌으니 역사기념도 좋겠지 하는 식의 막연한 신뢰는 위험하다. 공공역사에 대한 능동적 관심과 참여야말로 민주 시민의 덕목이다.

망각은 수동적 현상이지만 기억은 능동적 실천이다. 망각은 개인적 행위이지만 기억은 상호작용의 결과다.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은 정치공동체 구성원들의 능동적인 집단적 논의, 즉 비판적 토론과 사회적 소통 과정을 통해 건립되어야 한다. 건립 과정에서 이견과 논쟁이 있다면 결정을 유보하고 재론하고 재고해야 한다. 그 ‘과정’ 자체가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높이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박종철과 김근태의 길, 즉 민주주의다. 정치폭력과 민주주의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최신 성과, 건축과 조형을 통한 예술적 재현의 멋진 지혜, 민주시민교육의 발전 전망 등이 서로 얽히고 융합하는 특별한 문화공간이 되길 빈다.

이때 국가기관이 겸손해야 한다는 걸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다원주의적 소통과 지혜의 융합을 매개하는 데 중심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집단학습을 통한 민주적 토론의 광장을 활짝 열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국가폭력의 만행과 민주화운동의 기억이 과거에 대한 것이지만 결국 현재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사회적 기억과 전승이라는 ‘두 번째 역사’는 ‘첫 번째 역사’의 단순 재현으로 이뤄질 수 없다.

국가폭력의 ‘기억’ 장소는 비통과 분노를 부른다. 추모와 공감은 폭력 현장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전제이다. 하지만 엄숙의 무게와 감정의 과잉은 형식적 의례나 의무의 강박을 낳고 다양한 질문과 생기 있는 토론을 막기 쉽다. 이해와 설명을 자극하고 숙고와 토론을 촉진하는 것은 결국 ‘역사’다. 그렇기에 ‘민주인권기념관’은 도덕적인 집단 감성을 창출하는 ‘과거 재현의 공간’을 넘어 성찰적이면서 소통 가능한 민주주의 정치의식의 형성을 돕는 ‘역사광장’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민주인권기념관’의 방문객들은 과거 폭력의 아픔이나 영웅적 투쟁의 위용에만 갇히지 않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만나 민주와 인권의 미래를 꿈꿀 수 있다. ‘진실을 구하는’ 크로노스들은 그렇게 다시 등장한다. 그것이 ‘죽은 자의 관이 산 자의 심장’이 되는 길이다.

<이동기 | 강릉원주대 교수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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