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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초등학생 때 학교가 끝나면 아버지 가게로 달려가곤 했다. 아버지는 시내 한복판 간판 가게가 모여 있는 곳에서 간판 가게를 했다. 도시에 하나쯤 있던 중앙극장이 아버지 가게 맞은편에도 있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그 극장에서 영화 간판을 그렸다고 했다. 아버지는 스무 살에 일찌감치 ‘부장’ 명함을 달았다고 자랑했지만, 그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의 눈에 아버지는 용케 극장 공짜표를 잘 얻어오는 간판장이일 뿐이었다.
한때는 일하는 사람을 두어 명씩 두고 일할 정도로 간판 가게가 잘되었다. 가게 안에 피워 놓은 난롯불이 온종일 활활 타올랐고, 그 불에 아크릴을 구부리는 냄새가 진동했다. 수십 년 동안 그랬듯이 중앙극장도 일 년 열두 달 바쁘게 간판을 갈아치웠다. 그가 아버지 가게와 중앙극장을 드나들면서 더디게 자라는 동안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아크릴이 네온사인이 되는가 싶더니 언젠가부터 서울 충무로에 가면 인쇄기에서 광고 전단 찍어내듯 간판도 찍어냈다. 난롯불도, 붓도 필요 없는 세상이 올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간판장이들은 황망하게 골목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도 버텨내지 못하고 가게 문을 닫았다. 그 뒤로 그의 아버지는 간판장이의 삶이 세상에서는 어떤 간판도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몸소 겪어야 했다. 아버지뿐이 아니었다. 중앙극장은 동시 상영 극장이 되었고, 불야성을 이뤘던 시내는 주말에도 한적했다. 그의 기억 속 아버지는 쇠락한 골목과 같았다.
“우연히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쓴 일기를 봤어요. 아버지의 삶도 뜨거웠더라고요.”
어머니를 여의고 의지가지없이 도시에 흘러들어와 극장 간판 일을 배운 소년의 일기는 작업 일지와 같았다. 작업장에서 먹고 자며 온갖 허드렛일을 한 소년은 붓을 들면서부터 남들보다 더 잘하려고 자신을 닦아세웠다. 그의 아버지 일기장에는 목표만큼 연습하지 못한 반성이 적혀 있었으며, 자신보다 뛰어난 이를 질투하는 마음도 솔직하게 드러냈다.
“아버지가 처음부터 아버지는 아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거죠.”
그만 그런 게 아니라 대개의 자식들이 그걸 잊고 산다. 부모들은 쇠락한 골목처럼 이름이 잊힌 채 늘 바쁘다고만 하는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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