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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경제위기에 직면한 2007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명예교수인 토머스 매크로는 <혁신의 예언자>라는 슘페터의 전기를 출간한다. 부제는 ‘요제프 슘페터와 창조적 파괴’였으나 2012년 우리나라에 번역되면서 ‘우리가 경제학자 슘페터에게 오해하고 있었던 모든 것’으로 바뀐다. 경제위기의 발단이 자본주의의 부조리가 아니라 ‘혁신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라고 눙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1883년 같은 해에 태어난 케인스와 슘페터는 서로 다른 길을 갔다. 신고전학파에 맞선 케인스는 노동자, 더 나아가 민중에 대한 부의 배분이 자본주의의 번영을 위해서 중요하다는 것을 밝혔다. 반면에 슘페터는 신고전학파의 완성자로서 ‘혁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에 반격의 기회를 안겨주었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사명은 자본이 취하는 불로소득인 이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에 있었다. 부의 창출에 대한 자본의 기여는 같은 양의 노동의 기여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경제학자가 매진하였다. 하지만 노동하지 않는 자본이 부의 상당수를 독차지하는 것을 사회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압도적인 힘을 지닌 자본이 이윤을 다소 희생하면서 부의 분배와 사회보장제도에 동의한 배경이다.

하지만 자본이 ‘혁신 프레임’을 선점하면서 상황이 변한다. ‘묵은 조직·풍속·습관 따위를 바꾸거나 버리고 새롭게 함.’ 혁신의 사전적 의미이다. 슘페터는 여기에 ‘창조적 파괴’라는 찬란하고 선정적인 수식어를 부여하며 경제모델로 끌어왔다. 드디어 보수가 진보로부터 ‘새로움’이라는 상징을 빼앗을 명분을 얻었다.

창조의 대상은 부이며 파괴의 대상은 부의 축적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이다. 이 논리체계에서는 돈이 돈을 낳는 부조리한 구조에서 ‘그 부조리’가 아니라 ‘그 부조리를 개선하자는 주장’에 ‘묵은 것’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울 수 있다. 혁신적 자본, 기업가주의(Entrepreneurialism)라는 집단 최면에 전 세계가 빠져들었다. 그 결과가 현재의 경제위기이다.

우리나라에서 혁신은 우상(idol)이다. 혁신이 주류가 된 배경에 대해 고민과 숙의 없이 진보진영에서도 사회혁신을 거론한다. 물론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 진정한 혁신’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부의 창출이 혁신’이라는 프레임이 만연한 상황에서 사회적 가치보다 이윤창출을 위한 효율성이 우선되는 걸 막기 어렵다.

그런데 한술 더 떠 ‘마을공동체와 혁신’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엉뚱한 정책이 나오기도 한다. 얼마 전 한 광역지자체에서 마을공동체 주민제안 공모사업 심사에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였다. 요즘 이슈인 비트코인의 위·변조를 막기 위한 해킹방지 기법이다. 소규모 집단에서 무기명투표가 필요한 경우 유용하다. 많은 주민을 참여시키겠다는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마을공동체사업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이 기법은 적절치 않다.

마을공동체사업의 핵심은 직접 참여이다. 주민을 마을 현장에 드러내는 게 목적이다. 서로의 의견을 마주 보고 주고받는 게 중요하다. 온라인 무기명투표는 의미가 없다. 객관성과 투명성을 담보한다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는 투표할 수 없게 한 것도 엉뚱하다. 자신이 직접 참여할 활동도 아닌데 좋아 보이는 사업에 투표하게 한다는 발상은 마을공동체 사업이 왜 필요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자본의 때가 묻은 혁신이 마을 주변에서 맴돌면 이처럼 엉뚱한 시도도 계속될 것이다. 마을 현장은 혁신이란 ‘용어’를 단호히 거부하고 ‘참여’ ‘연대’ ‘평등’ ‘상호존중’ ‘자치’ ‘풀뿌리민주주의’ ‘장소’ ‘환경’ ‘지역’ ‘역사와 전통’ ‘다양함’ ‘개성’처럼 좀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주제에 매진해야 한다.

<강세진 박사·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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