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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취향’이나 ‘입장’보다는 ‘인식’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언제나 믿고 있지만, 올해의 마지막 글이니까, 취향을 드러내는 일이 한 번 정도는 용서되었으면 싶다. 아마도 주관적일 ‘올해의 책’ 목록을 적어보려고 한다. 이미 언론을 통해 선정된 책들은 넣지 않았다. 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책도 뺐다. 외서(外書)로 한정한 것은 지면이 넉넉하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다. 번역자와 출판사의 이름을 또박또박 눌러 적었다. 다 따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책을 많이 만드는 번역자와 출판사들이다. 언제나 수고와 가치에 비해 보상은 적은 일을 수행하는 이 이름들을 기억해 주시길 바란다. 이 글은 나대로 연말 결산을 하고 출판인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지만, 광고로 읽힌다 해도 거리낄 것이 없다고 느낀다.

‘논픽션 내러티브 저널리스트’인 존 맥피는 1965년 이래로 서른 권 정도의 책을 낸 거장이다. 그의 가장 최근 책인 <네 번째 원고>(유나영 옮김, 글항아리)와 <더 패치>(윤철희 옮김, 마음산책)가 올해 나란히 번역됐다. 그는 수십년 동안 영화배우, 오렌지, 낚시, 핵무기 등등에 대해, 그러니까 모든 것에 대해 써왔다. 놀라운 것은 무엇을 쓰건 언제나 그의 글이 된다는 것이다. 세계와 인간의 ‘사실들’을 경배하듯 옮겨 적기, 그뿐이다. 그런데 묘한 긴장감이 배어들고, 심지어 아름다워지려는 낌새가 보이며, 글이 끝날 땐 뜻밖의 여운이 남는다. 이 모든 것이 정교한 설계의 결과임을 알게 되는 건 그때다. 두 책의 첫 글만 읽어보라. ‘예술은 곧 구조’라고 생각하는 나는 그가 예술가라는 사실을 완전히 인정했다.

<날카롭게 살겠다, 내 글이 곧 내 이름이 될 때까지>(김승욱 옮김, 마티)의 원제목은 그냥 ‘Sharp’다. 지나치게 예리한, 그래서 불편한 여자로 여겨진, 20세기 미국 문화사를 빛낸 여성 저자들에 대한 촘촘하고 위트 넘치는 프로파일링 작업이다. 이 책은 작년에 나온 다른 저자의 <터프 이너프>(김선형 옮김, 책세상)와 좋은 짝이 될 만한데, 후자는 지나치게 강인해서 여자같지 않다는 소릴 들었던 여성 저자들을 대상으로 유사한 작업을 한 사례다. 두 책 모두에 등장하는, 그러니까 ‘샤프’하기도 하고 ‘터프’하기도 한 인물도 있을까? 답은 한나 아렌트, 메리 매카시, 수전 손태그, 조앤 디디온이다. 지성사의 무게와 이면사의 흥미를 동시에 보장하는 이런 책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 책들을 읽고 알았다.

좋은 책을 만드는 번역·출판인들
그들을 기억해주길 바라며 선정
존 맥피의 ‘네 번째 원고’ ‘더 패치’
또래 시인 리치·섹스턴의 책 등
나에게 한 해 ‘선물’ 같았던 작품들

실비아 플라스, 에이드리언 리치, 앤 섹스턴은 1930년 전후로 태어난 또래 시인들인데 뒤의 두 사람도 더 빨리 더 많이 소개됐어야 했다. 리치의 산문선집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와 섹스턴의 시선집 <밤엔 더 용감하지>(정은귀 옮김, 민음사)의 출간은 올해의 선물이다. 1963년 플라스가 자살을 택하자 섹스턴은 혼자 떠난 그를 원망하는 시를 썼고, 1974년 섹스턴이 같은 선택을 하자 리치는 “글을 쓰는 모든 여자는 생존자”(틸리 올슨)라는 문장을 인용하며 끝낸 글을 써야만 했다. 이렇게 세 사람은 연결돼 있다. 아니, 그 후로 지금까지, 수많은 여성 창작자와 독자들은 연결돼 있을 것이다. 나는 ‘안다고 할 수 없음’과 ‘몰라도 되지 않음’ 사이에 끼인 채로 그들의 문장을 읽는다.

사회학자 제니퍼 M 실바의 첫 책 <커밍 업 쇼트>(문현아·박준규 옮김, 리시올)의 부제는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다. 노동계급 청년들의 독립, 취업, 결혼 등이 유예되거나 포기되는 현실을 개탄하는 빤한 책일까. 그게 아니라 그들이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성인이 된다는(된다고 느낀다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통찰이다. 과거의 불행을 극복하고 자아를 강화하는 과정을 ‘성장’이라고 평가하며 제 삶도 그렇게 서사화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을 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청년일수록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내 불행의 근원인 가족을 비판하고, 세계에 불만을 품는 또래 청년들을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철없는 이들로 폄하한다. 이들의 고통은 고독하기까지 하다. 나는 그것을 광주의 강의실에서도 느낀다.

에릭 올린 라이트의 <21세기를 살아가는 반(反)자본주의자를 위한 안내서>(유강은 옮김, 이매진)는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지만 사회주의에도 회의적인 이들을 대상으로 “급진적 형태의 경제민주주의”가 실현 가능한 최선책임을 호소하는 책이다. 자본주의에 아무 유감이 없는, 무지함과 무정함을 겸비한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자본주의의 성과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끔찍한 비도덕적 결과들을 비판하는 일은 모순도 위선도 아니라고. 먼저 나온 대작 <리얼 유토피아>(권화현 옮김, 들녘)를 어려워할 이들을 위해 쓴 책이다. 마지막 챕터를 쓰기 직전 백혈병 진단을 받은 저자는 남은 목숨을 헐어 책을 완성하고 석 달 후 작고했다. 먼 나라의 어느 학자를 기리며, 나는 서른 명의 학생들과 지난 9월에 이 책을 읽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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