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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에 의해 갑자기 강요당한 개국
외적 굴종과 내적 분노로 정신분열
조선을 지배하고 무모한 전쟁 도발
패전 기억 지우기 위해 경제에 매진”


미국 순방길에 오른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뉴스가 보도될 때마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보게 됐다. 얼굴 표정을 통해 그가 느끼는 감정을 유추해볼 수 있을까 기대했다. 대중 앞에서 연설할 때, 곤란한 질문에 답할 때, 만찬에서 흥겨움을 표현할 때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풍부해 보였다. “마음이 아프다”고 말할 때는 그런 표정을 짓기 위해, 만찬회장에서는 즐거움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주관적 오류가 포함된 개인적 생각이다.

나는 아베 총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까지 자신들의 전쟁 도발이 옳고 정당한 행위였다고 믿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주변 국가를 침략·약탈한 행위를 국가적 영광의 역사였다고 여기지도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도 내면에서는 전쟁범죄에 대해 수치심과 참회의 감정을 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나라 수장으로서, 전쟁을 수행한 조상의 손자로서 그런 감정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범죄를 인정하는 순간 일본 근대사 100년이 부정되고, 국가 정체성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면에서는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부를 향해서는 “옳고 선하고 정당하다”는 태도를 취해야 하는 아베 입장도 고역스럽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역시 오류가 포함된 개인적 생각이다.

일본 정신분석학자 기시다 슈의 글을 읽어보면 그는 갈등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확신범 쪽에 가까워 보인다. 기시다 슈는 도쿠가와 막부시대(1840~1868년) 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국민을 정신분석한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일본 국민이 정신분열증이라는 결론을 제시한 다음 글을 풀어간다.

“일본 국민의 정신분열적 기질을 만든 것은 1853년 페리 내항사건이다. 쇄국 상태에 있던 도쿠가와 막부시대는 외부 세계를 알지 못하는 나르시시즘의 시기에 속한다. 유사 이래 한 번도 외국의 침략이나 지배를 받은 적 없는, 응석받이 어린아이였다. (중략) 그때 별안간 닥쳐온 것이 페리가 이끄는 동인도 함대였다. 당시 일본은 성숙한 대상관계를 맺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해 있지 않았다. 페리를 쫓아 보낼 힘도 없었다. 일본은 억지로 개국이 강요됐다. 시바 료타로는 어느 글에서 ‘일본은 미국에게 강간당했다’고 말했는데 정말이지 일본은 억지로 가랑이를 벌리도록(항구를 열도록) 강요된 것이었다.”


저자는 페리 쇼크가 일본 국민의 정신분열증 원인이 된 트라우마였다고 분석한다. 침략자를 맞은 일본은 마음을 두 가지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외부 지배자에게 복종하고 적응하는 외적 자기와, 본래의 감정을 억압하는 내적 자기로 마음을 나누었다. 외적 자기는 살아남기 위한 행동들에서 감정을 제거해야 했고, 내적 자기는 생생하게 느껴지는 불안·분노의 감정을 억압해야 했다. 그렇게 일본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잃으며 동시에 자기 정체성도 잃어갔다. 대신 존왕사상(尊王思想)이라는 심리적 성채를 등장시켜 안전을 보장받는 의존 대상으로 삼았다. 순수 무결하며, 신성불가침이고, 오직 헌신을 바치는 대상으로서의 천황 이미지는 일본 국민의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회피되고 억압된 것은 반드시 당사자에게 되돌아온다.

“유럽과 미국 등 여러 나라에 굴종적인 외적 자기는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일본인들의 내적 자기와 자존심에 박힌 가시였다. 굴종을 강요받은 외적 자기는 그것과 관련되어 되돌아오는 감정을 외부로 투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상으로 선택된 불운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정한론(征韓論)의 심리적 배경이 그것이었다.”

일본은 조선에 열등한 내적 자기를 투사하면서 한편으로는 공격자인 미국·유럽인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조선인들을 지배하고 열등한 종족으로 치부하면서 상대적 우월감을 누렸다. 그렇게 분열 증상을 심화시켜 가던 일본이 기어이 정신분열병을 발병시킨 것이 미국과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억압되어 있던 100년의 증오가 정신병으로 폭발한 전쟁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당사자는 패배를 믿지 않는 전쟁이었다. 타인에게는 기이해 보이지만 당사자는 분명한 확신을 갖는 것이 정신병자의 행동 특성이다.

“전쟁에 패했을 때 일본인은 하룻밤 사이에 온순하고 선량한 평화주의자로 돌변했다. 어제까지 목숨을 버리며 돌진하던 일본인들이 오늘은 미소를 띠며 점령군 병사들을 환영했다. 게다가 점령군이 요구하기도 전에 위안부를 조직하여 제공했다.” 기시다 슈는 그것을 정신분열증 환자 특유의 태도 전환이라고 설명한다. 전후 일본의 대미 외교는 다시 굴종과 추종 일변도가 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뜻에 대립되는 외교 방침을 가질 수 없었다. 전후 일본이 경제성장에 매진한 것은 “무력으로 실패한 것을 경제적으로 이루어내려는 광범위하고 암묵적인 합의”의 결과였다고 한다.

기시다 슈의 책 <게으름뱅이 정신분석> 중 ‘정신분열증으로서의 근대 일본’라는 글의 내용이다. 저자는 1975년 한 해 동안 일본 여러 매체에 발표한 글을 모아 이 책을 묶었다고 한다. 일본은 전후 독일로부터 정신분석을 수입했고 이후 꾸준히 학문을 발전시켜 다양한 심리치료 기법을 개발해 왔다. 개인적으로는 1970년대 중반에 이미 그처럼 도저한 자기 성찰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감탄스러웠다.

분열은 약자가 사용하는 생존법이다. 우리 세대 남편들은 어느 날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면 뒤통수를 맞은 듯 당황하곤 했다. 온순한 아내가 실은 마음을 두 가지로 나누는 분열의 생존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내들은 남편의 요구와 지시를 말없이 수용하는 동안 반대 감정인 불만과 분노들을 내면에 꾹꾹 눌러두고 있을 뿐이다. 남편의 일방적 판단과 통제를 죽을 힘을 다해 참다가 결국 폭발시킬 때 그것은 병증이 되거나 이혼 통보가 된다.

국가 차원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나라도 집단 무의식 차원에서 마음을 두 가지로 나누는 생존법을 사용해왔다. 친미적 태도와 반미 감정이 뒤섞여 있고, 반일 감정과 일본 문화에 대한 추종이 함께 존재한다. 특히 일본은 우리가 정당하게 분노를 쏟아낼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한 것을 우리도 그들에게 똑같이 돌려주는 셈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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