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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글 못 쓰는 작가

opinionX 2016. 11. 17. 14:30

최근에 마감일을 앞두고 한 편의 글을 써보려고 애쓰다 결국 쓰지 못한 일이 있었다. 나는 오래도록 어떻게 써야 할까 고심하다 포기했고 글쓰기를 포기했다는 사실 탓에 열패감에 사로잡혔다. 사소해 보이는 이 문제가 내게는 퍽 중요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지 십오륙 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청탁받은 원고를 쓰지 못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감일을 넘기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되도록 마감일에 맞춰 송고하기 위해 애썼다. 때로는 마음에 흡족한 글일 수도 있었고 아닐 수도 있었지만 단번에 명문이나 명작을 쓰겠다는 야심은 없었으므로 끈질긴 글쓰기의 과정 자체를 즐기는 쪽이었다. 그런 내가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멍하니 시간만 흘려보냈다.

마감일이 다가왔다는 재촉 문자를 받은 뒤부터 마감일이 지났으나 며칠 더 말미를 주겠다는 문자를 받게 된 날까지, 기어이 그 며칠의 말미를 넘길 때까지도 쓸 수 없었다. 다뤄야 할 소재가 주어진 원고였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였다. 학살이나 다름없는 백남기 농민 사건을 프리즘 삼아 국가폭력을 논하기로 한 시론(時論)이었다. 그러나 글을 쓰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사전적 정의에 따르자면 ‘그때그때 일어나는 시사에 대한 평론이나 의론’인 시론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사태, 그이의 죽음이라는 막대한 사태 앞에 속수무책이어서였다. 진정으로 그이가 살아 돌아오길 바랐기에 내가 맞닥뜨린 현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상상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그 현실을 다루는 글을 쓴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한 사람의 목숨조차 지켜낼 수 없는 글쓰기, 사후에 그 의미를 다루는 글쓰기가 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글쓰기 자체를 회의하게 되는 이런 순간을 처음으로 겪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수리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한 놀라움을 느꼈고 여태까지 내가 써왔던 모든 글들이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사태는 점점 심각해져 하나의 추문으로만 여겨졌던 대통령에 관한 소문들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온 나라가 들끓게 되었다.

지난 주말 아내와 더불어 세 살배기 딸을 유모차에 태워 광화문으로 나갔다.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라서 더는 글 뒤에 숨을 명분도 없었으므로 한 목소리나 보태자는 심산이었다. 백만의 인파가 몰려든 그곳에서 뜻밖에도 수많은 글들과 마주쳤다. 박근혜 하야, 아무것도 하지 마라, 너 없이 더 잘산다, 민주주의 파괴자 박근혜를 우주로, 우주가 무슨 죄냐…. 이 단순하고 명쾌한 문장들이 어떤 명문장보다 절실하게 다가온 이유는 내가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여서만은 아니었으리라. 현실이 아무리 압도적일지라도 인간의 희망을 짓밟을 수 있을 만큼 압도적인 현실은 없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우리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글 앞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왜 구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었다. 내가 쓰고 싶었으나 쓰지 못했던 글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사위는 어두웠으나 그날 거리에는 어둠이 내려앉지 못했다. 우리는 어깨 위에 머문 밤이 그 위에서 홀로 깊어가게 내버려두었다.

작가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 증오, 슬픔, 기쁨, 고통 등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작가에게서 그가 무얼 확신하는가를 느끼는 대신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아파하는지를 느끼게 된다. 나는 그날 광화문 거리에서 보았다. 한 시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아름다운 작가로 빚어내는지, 한두 사람이 아니라 100만을 1000만을 어떻게 아름다운 작가로 만드는지. 나도 거기에 편승하여 문장 하나를 지어보았다. 박근혜씨 좋은 말로 할 때 내려오시죠. 흡족하지는 않으나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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