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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금강산 가는 길

opinionX 2015. 5. 29. 21:00

중학교 수학여행을 못 갈 뻔했다. 집안에 우환이 있어 수학여행을 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을 때였다. 그때 아버지가 한 말이 있다.

“너무 낙담하지 마라. 네가 크면 금강산도, 백두산도, 다른 나라들도 다 가볼 수 있을 텐데….” “정말요?” “그럼!”

설마 했다. 학교에서도 무시로 ‘무찌르자 공산당’의 구호를 외치던 시절, 언감생심 어떻게 북한 땅을 밟아본단 말인가. 통일이라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어린 생각에 전쟁이라도 한 번 더 치르자는 말인가 싶기도 했다.

뒤늦게 알았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때 아버지는 수학여행을 금강산으로 갔었다. 돌아가시고서야 빛바랜 낡은 앨범에서 동무들과 금강산에서 찍은 사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가 1972년. 전쟁 후 20년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어린 나에게는 북한은 금단의 땅이었던 반면 아버지에게는 수학여행을 갔던 기억이 생생한 친근한 곳이었을 터였다. 그분으로서는 그저 수학여행을 못 가게 된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 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되돌아보면 격랑의 시기이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 고비를 맞을 때였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에 가 김일성을 만나고 ‘7·4공동성명’을 발표할 때였다. 그것은 곧 ‘10월 유신’으로 이어졌지만…. 아버지의 그 말은 두고두고 뇌리에 남았다.

그래서였을까? 중·고교 시절, 지리 과목처럼 지겨운 것도 없었다. 사과, 배 등 온갖 과일 산지는 물론 철광석, 구리, 금 많이 나오는 곳 등등. 오로지 ‘외우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 맥락 없이 외워야 하는 것들이 산더미 같은 지겨운 과목이 바로 ‘지리’였다.

그래도 지리부도 받는 즐거움은 하나 있었다. 유일하게 컬러인쇄가 된 교과서였다. 학년 초 잉크 냄새가 배어 있는 지리부도를 받으면 그것을 펼치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때 수없이 그려보았던 ‘꿈의 여정’이 있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차고 평양~블라디보스토크~시베리아~모스크바~베를린~파리~마드리드를 거쳐 지브롤터까지. 아프리카는? 다음 기회에….

그 꿈은 나이가 들수록 희미해졌다. 서울역 북쪽 철로 길은 송추 가는 교외선과 101보충대의 의정부역 즈음에서 딱 끊겼다. ‘분단’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정불변의 고유명사가 됐다. 국가보안법이 맹위를 떨치던 시절, 북한과 관계된 모든 것은 불가근 불가촉의 금기였다. 꿈속에서일망정 북한을 경유하는 여로는 아예 지워야 했다. 노문학과와 중문학과는 미래가 아닌, 과거를 탐색하는 학과 정도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1998년에 서소문 현대드림투어에서 금강산 관광 접수를 받고 있는 모습 (출처 : 경향DB)


1999년 말 금강산 갈 기회가 있었다. 1년 전 시작된 금강산 관광이 확대되면서 언론사 기자도 초청했다. 아버지가 말한 그런 시절이 정말 온 것이다. 호기롭게 후배 기자에게 양보했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럽다.

그 후에도 몇 차례 가볼 기회가 있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던 것이 이제는 가보고 싶어도 못 가게 됐다. 이북 출신으로 군에 몸담고 계셨던 장인도 ‘평양이라면 가보겠지만, 금강산은 그렇다’며 방북을 주저하다가 그만 유명을 달리하셨다.

그나마 다행인 건 2005년 초 금강산 가는 길의 남측 구간을 걸은 적이 있다. 언론인 안보현장 답사로 어렵사리 기회를 얻었다. 고성군 통일전망대에서 금강통문까지의 4㎞ 남짓한 거리. 한 해 전 개통한 금강산 육로 길. 2차선으로 잘 포장된 길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눈 덮인 산야에서 빛나게 뻗어 있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유유자적 허공을 가르는 철새들의 비행은 이곳이 남북 대치의 완충지대라는 것도 잠시 잊게 했다. 안내를 맡은 정훈장교도 이 길을 많이도 오갔지만 걸어보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걸음은 통문 앞에서 멈췄다. 그곳에서 1시간 정도를 더 걸으면 바로 북한 땅. 짧게는 3시간, 길게는 5시간이면 걸어서 금강산에 갈 수 있는 거리다.

며칠 전 세계 평화여성운동가 30여명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면서 비무장지대(DMZ)를 건너왔다. 당초는 판문점을 경유해 걸어서 오려 했다. 남측 당국이 난색을 표해 경의선 육로를 버스로 이동해야 했다. 아쉽다. 그 길을 걸어서 올 수 있었다면 이들 세계 평화여성운동가들은 그 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금강산 가는 길이 다시 트였으면 좋겠다. 승용차뿐만 아니라, 도보 통행까지도. 그렇다면 이번에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가능하면 두 아들 녀석들도 함께.


백병규 | 미디어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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