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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안 드는 작업자가 있으면 조끼를 입혀요. 자기들 멋대로 정해놓은 규정을 위반했다나? 1주일 동안 조끼를 입혀 일 시킬 때도 있어요. 다른 작업자들이 뭐라 생각하겠어요. 군대에서 고문관 없어진 지가 언젠데….”

경북 구미4공단에 입주해 있는 아사히글라스 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난주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왜 노조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이런 답이 돌아왔다. 폐쇄회로(CC)TV로 감시하는 곳은 봤지만 조끼를 입힌다는 곳은 처음 본다.

“작업자 경조사가 있으면 1인당 1만원씩 급여에서 공제해요. 처음엔 동의도 안 받았어요. 나중에야 동의서를 받더라고요. 얼굴도 모르는 분이라지만 솔직히 1만원 경조비 내는 걸 거절할 수야 있나요. 그렇더라도 마치 회사가 주는 것처럼 관리자가 전달하면 안되죠. 작업자 대표를 뽑아서 작업자들 이름으로 내는 게 맞지 않나요? 회사는 별도로 경조사 비용을 부담해야죠.”

깜짝 놀랐다. 비정규직이 노조 만든다고 하면 당연히 임금과 고용 문제가 가장 절실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금, 고용요? 당연히 절실하죠.” 이를테면 이곳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모조리 최저시급을 받고 있다. 오늘 입사해도 시급 5580원, 8년 근속한 고참도 시급 5580원의 최저임금을 받는다.

아사히글라스는 구미공단에 입주한 최대 규모의 외국투자기업이다. 구미공장 안에는 아사히피디글라스와 아사히초자화인, 2개의 법인이 같이 입주해 있는데 아사히초자화인만 따로 떼어서 보더라도 2009~2012년에 연 매출액 1조원 이상을 기록했다. 최근 일감이 줄어 매출액도 축소되긴 했지만 꾸준히 영업이익·당기순이익을 내고 있다. 하지만 일감이 줄어든 책임은 비정규직에게 떠넘기고 있다. 며칠 동안 출근을 하지 말라고 지시한 후 주차를 삭감하기도 했고, 나중에 일감 늘어나면 다시 부를 테니 지금은 나가달라며 권고사직으로 위장된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축소된 인원으로 3조 3교대를 시행하니 몸은 축나는데, 잔업특근으로 부족한 임금을 메우려니 골병이 든다.

그래, 이런 것들은 한국의 비정규직 모두에게 똑같은 현실이다. 어쩌면 너무 내재돼 있어서 바깥으로 분노가 표출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본은 낮은 임금과 불안한 고용에서 멈추지 않는다. 비인간적인 수모와 멸시를 주고, 한 푼이라도 더 수탈하기 위해 뻔뻔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아사히글라스에선 조끼와 경조금이 문제였지만, 다른 사업장에서도 기상천외한 비인간적 노무관리가 기승을 부릴 것이다. 하지만 예년과 달라진 게 있다. 이들이 노동조합 문을 두드리는 빈도가 잦아졌다는 것. 현대위아 광주공장과 한국지엠 군산공장에서 비정규직 노조가 만들어지고, 현대중공업에선 하청노동자 노조 가입 운동을 펼치고 있다. 계약만료가 집중돼 있는 6월30일을 앞두고 집단해고가 예상되는 사업장들에서도 노조 결성 준비가 활발하다. 새롭게 노조를 만드는 이들 입에서 똑같이 나오는 말들이 있다. “인간으로 대접만 해줬어도 노조 안 만들죠.”

서울 강서구 화곡동 88체육관에서 열린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대의원대회에서 한상균 위원장이 대회사를 하고 있다. _ 연합뉴스


비정규직 인간선언! 이들이 노동조합을 만드는 이유이다. 몸이 너무 아파 조퇴를 하려 할 때, 부모님 제사 모시려 잔업이나 야근을 빼러 회사에 읍소할 때마다 ‘우리가 과연 인간으로 살고 있나’를 의심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이제 의심만이 아니라 직접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인간처럼 살려면 단결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다윗의 출중한 돌팔매 기술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게 아니다. 다윗은 골리앗에 맞서 싸우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다윗들과 연대하는 길을 선택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오늘도 뜨거운 연대로 나서려는 수많은 다윗들이 인간선언을 이어가고 있다. 6~7월 뜨거운 여름, 태풍보다 강력한 미조직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 열풍을 기대해본다.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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