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00년 새천년민주당. 김대중 정권의 제2인자였던 권노갑 고문은 자신부터 총선에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호남 및 수도권의 중진의원들을 주저앉혔다. 그 자리에는 386출신들 및 신진 영입인사들이 앉게 되었고, 총선에서 민주당은 새로운 이미지를 덧칠할 수 있었다. 이번에 김상곤 혁신위원장이 자신부터 내려놓겠다고 했다. 물갈이의 신호탄으로 정치권에서는 받아들이지만,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고개를 가로젓는다. 권력의 속성이 공천 과정에서 너무나 잘 읽히기 때문이다.

공천권은 권력자가 휘두를 수 있는 최고의 고품격 상품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자들은 공천권을 무기로 여권 인사들을 관리·통제했고, 떡고물을 던져주기도 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강고하게 변하지 않은 정치권 관행을 꼽자면 권력자들의 무기로서의 공천권 행사다. 최고 권력자들은 공천권을 독점적으로 움켜쥐고 자파 의원들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정적들을 숙청하는 수단으로써 공천권을 휘둘러왔다. 찍히면 바로 아웃이었다, 1988년 노태우 민정당 총재는 전두환 측근과 제5공화국 창립자들을 공천에서 배제시켰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의 정권 핵심들은 친박계 공천 학살(?)을 단행했다. 2012년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새누리당 권력을 장악했을 때는 역전 현상이 발생했다. 친이계 배지들이 주르르 공천에서 탈락했다. 3김 시대의 공천권 역시 3김으로 철저히 집중됐다. 국회의원들은 공천권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공천을 얻기 위한 밤의 무대는 거래와 충성서약으로 얼룩졌다. 2000년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 운동은 기득권으로서의 공천권에 일격을 가했다. 이때부터 여야는 민주적 공천을 표방하면서 국민경선, 상향식 공천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시늉만 낼 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상향식 공천은 선거 홍보용 이벤트로 쓰인 것이 사실이다. 아니면 골치 아픈 지역, 즉 계파 간 힘이 팽팽한 곳을 경선지역으로 선정해서 살아남는 자를 선택하는 생존 공천이었다. 그 외 대부분의 지역은 단수공천, 전략공천, 비례대표 당첨 등 계파 간 나눠먹기식의 고단수 방정식이 관통됐다.

지난 4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4·29 재보궐선거 후보자들이 국회 대표실에서 열린 공천장 수여식에서 선거에 대한 생각을 손피켓에 써서 들어 보이고 있다. (출처 : 경향DB)


민주주의가 발전된 외국의 경우에는 오래전부터 공천의 제도화가 정립돼 있다. 한국 정당처럼 매번 선거 때마다 공천 룰, 공천 불복, 공천 잡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은 각 지역에서 알아서 예비선거, 코커스 등을 통해 후보자를 지명한다. 정당정치가 발전된 영국 역시 보수당은 중앙당에서 심사, 지구당에서 당원 비밀투표로 결정한다. 노동당은 노동조합 조직 및 지구당에서 공천권을 행사한다. 독일은 연방 선거법에 후보자 선출은 당원대회나 당 대의원대회에서 비밀투표로 한다고 규정돼 있다.

김상곤 혁신호가 성공하려면 야당을 정당답게 만드는 일부터 해야 한다. 정당의 하부 기반이 바로잡혀야 상향식 공천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다. 지역의 대의원을 지역위원장이 임명하고, 경선용 모집 당원들이 난무하는 몰상식적인 정치환경에서 당원 경선이 제대로 이루어지겠는가. 관심도 없는 정당 경선에 국민들이 왜 참여해야 하는지, 그저 미국에서 하니까 좋다고 채용하는 예비선거제인가. 결국은 돈과 조직을 통한 허울 좋은 국민참여 경선제가 될 수밖에 없다. 지역의 기득권부터 버리게 만들어야 한다. 지역위원장을 중앙당 줄 서기에서 지명하지 말고 지역 당원대회에서 선출하고, 당원들이 대의원을 선출하는 일부터 한번 시작해보자. 공천 문제는 정당 틀이 잡히고 민주적 토양이 확보되면 자연스럽게 제도화될 수 있다. 정치 야심꾼들이 시류에 편성해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했던 한국의 정당사를 되돌아보면 공천의 해법이 보인다. 좀 부탁이니 제대로 된, 상식이 통하는 정당부터 건설하기 바란다.


유용화 | 동국대 대외교류연 책임연구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