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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나오는 이는 지드래곤이다. 다운받은 그의 사진이 아니라 함께 찍은 것이다. 그것도 한 팔은 그의 어깨에 두르고, 한 손은 V자를 그린 채로 말이다. 낫살이나 먹고 주책이라는 핀잔도 간혹 듣지만 부러움 섞인 반응이 좀 더 많다. 뭐가 됐든 유치찬란한 자랑질 맞다. 지금이야 바꾸기 귀찮아서지만 몇 년째 이 사진을 고수했던 데는 모종의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 이 사진을 올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중학생이던 딸아이의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헐, 대박. 아줌마! 진짜 지드래곤이에요?” 한두 차례 통화했던 그 친구 전화기에 내 번호가 저장돼 있었나보다. 난 아이 친구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셀러브리티가 됐다. “저 ○○ 친군데요, 어떻게 하면 기자가 될 수 있나요” “아줌마, ㄱ이랑 ㄴ이랑 사귀는 거 진짜예요?” 따위의 문자부터 좋아하는 가수의 사인을 받아달라는 전화와 카카오스토리 친구신청까지 들이닥쳤다.

처음에 당황스러웠던 일은 생각지 않은 쪽으로 발전했다. 친구들을 통해 아이의 카카오스토리에 자연스럽게 접근하면서 아이의 학교생활이며 친구관계, 자주 쓰는 용어 등 평소의 대화나 생활에서 파악되지 않던 부분을 좀 더 세밀하게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가 친구에게 남긴 댓글로 행간의 의미가 읽혔고 사고방식, 습관 등도 유추할 수 있었다. 아이와 연락이 되지 않을 때도 쉽게 소재가 파악됐다.

나는 개방적이고 이야기 통하는, 쿨한 어른으로 비칠 것이라고 자부했고 쉽게 아이의 ‘사생활’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다고 자만했다. 유명인들이 자녀의 소셜미디어 글로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는 것을 왕왕 보면서, 쥐뿔도 없는 주제에 나름 안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아이는 진작에 페이스북으로 갈아탔다.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일종의 ‘권력’을 차단당할 때 생기는 금단현상 비슷한 것을. 온·오프 공간에서 아이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을 얼마간 하던 끝에 페이스북 친구신청을 슬쩍 보냈다. 며칠 뒤 “가족끼리라도 지킬 건 지켜야지”라는 야멸찬 답변이 돌아왔다. 제 친구들이 내게 신청한 것까지도 야무지게 단속을 하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던 욕구가 다시 살아난 것은 며칠 전 한 국회의원의 아들 논란이 불거지고서다. 저녁자리에서 한 지인이 “부모한테는 필요에 따라 자식 소셜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면서 “이놈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알 길이 없어 불안할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그의 말에 몇마디를 보태려던 찰나, 다른 동석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건 근본적으로 부모 자식 간에 유대관계가 형성되지 않아서예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데 평소 생활에서 발견하지 못한다면 자식한테 성적 말고는 관심이 없는 거죠.” 몇차례 논박이 오갔다. 딱히 틀린 말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동의하기도 힘들었다.

자식문제로 논란이 일 때면 언제나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경구가 비판의 논거로 등장한다. 세상에 나서기에 앞서 수신제가가 이뤄져야 함도 옳다. 남을 향해 쉽게 할 수 있는 이 말들을 막상 내게 던져보니 한없이 위축된다. 금지옥엽 같은 자식이지만 살다보면 기가 막히고 속 터질 때,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가라앉히기 힘들 때가 좀 많은가. 도대체 누굴 닮아 저러나 싶다가도 결국 날 닮은 것이 서늘한 진실이다. 그러니 예로부터 세상만사 마음대로 안되는 일이 자식 일이라고, 자식 문제로 절대 장담해선 안된다고 하지 않나. 어쩌겠나. 피하고 싶어도 평생 지고 가야 할 과제인 것을.

‘자식을 자랑거리 삼으려 말고 자식에게 자랑스러운 부모가 되자.’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본 글을 수첩 맨 앞장에 적었다. 매일 아침 업무 시작 전에 이를 들춰 보며 마음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단순한 이 시도와 반복이 의외로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문화부 |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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