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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재명 성남시장의 ‘2등 경쟁’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한 달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 시간과 순위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다. 2017년 대선 정국이 안희정으로 요동치고 있다.

‘공적 됨됨이.’ 십수년간 지켜본 정치인 안희정에 대한 주관적 평가다. 1990년 3당 합당 후 이념도 정치도 헌 옷처럼 느껴져 여의도(이철 의원 비서관)를 나설 때, 1993년 친구 이광재와 서울 연신내 허름한 술집에서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도원결의 할 때, 2002년 노무현 정부 출범 후 홀로 멍에를 짊어졌을 때도 안희정은 조직과 대의명분이 우선이었다. 2007년 대선 패배, 2008년 총선 공천 배제 땐 ‘폐족’이란 말로 친노를 일으켜 세웠다.

스스로의 자리가 보장되지 않는 혁명을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게 한국 야당사다. 가진 게 어정쩡해서다. 안락한 2등이 보장되는 소선거구제를 움켜쥐고 있는 것만 봐도 짐작이 간다. 그래서 결정적일 때 늘 보수적이었다. 1987년 분열, 1990년 민자당 합당, 1997년 DJP 연합,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등은 선명한 궤적이다. 안희정은 그럴 때마다 “동의할 수 없는 가치와 타협할 수 없고, 더욱이 그 동의할 수 없는 것이 현실 권력으로 존재할 때 난 그 권력을 (중략) 관용, 용서, 이해할 수 없다”(2004년 7월3일 옥중일기)고 다독여 왔다. 이렇게 하지 않고 역사적 소명의식으로 산다는 건 그저 세상의 대기권 밖을 서성이는 일이었을 테니.

안희정 충남지사가 21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4차 혁명과 미래인재’ 콘퍼런스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안희정은 이처럼 예측 가능했다. 그런데 ‘선한 의지’, 대연정 제안, 사드 배치 신중, 녹색성장과 창조경제 계승…. 파문도 이런 파문이 없다. 파문이 지나간 자리마다 기존 정치가 익숙하게 밟았던 경로 의존성도 흔적조차 없다. 안희정 ‘현상’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대선이라는 최고 권력 획득전에서 한 후보의 발언을 두고 전략이냐, 소신이냐는 격론이 연일 벌어진다. 즉위를 반대하는 노론을 상대로 ‘아버지의 원한을 갚으려 하지 않겠다’고 한 정조의 시그널도 어른거린다. 안방(야권)에서 쫓겨날 듯한 질타를 받으면서도 지지율은 고공상승 중이다. 순식간에 야권 대 야권의 대결로 대선 구도를 바꿔 버렸다. 여권은 ‘안희정 경계령’을 내렸고, 야권에선 선거철 전가의 보도였던 연대·단일화 논쟁이 사라졌다. 생존조차 불투명했던 진보정당은 회생 기회를 잡았다.

합리적 차별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국민정당(캐치올 정당)화된 여야, 길을 잃었지만 안길 곳 없는 보수 등 정치환경이 바뀐 이유도 있다. ‘노무현 적자’라는 배경 또한 안희정에겐 든든한 방어막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안희정 현상이라고 단언하진 못하겠다. 대선 주자가 개인 선의부터 확신한 것, 구체적으로 치열해야 할 때 담론의 늪을 만든 것, 민심의 언어로 세상을 읽지 않고 있는 것. 대연정만 해도 싸우지 않기 위해 손잡자는 게 아니다. 안정적 국정운영을 위한 쓰임새가 더 크다. 분권형 개헌이 불가피하다. 법과 시스템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법과 시스템이 필요한 대목을 그는 지나쳤다.

무엇보다 정치인의 신념은 철학과 계몽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공동체 이익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약속하고, 실천하면서 얻게 되는 것이다. 미국 역사상 첫 의료보험제로 평가받는 오바마 케어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의료복지’라는 신념을 안겨줬듯이.

구시대 마지막 열차와 새시대 첫 열차는 같은 길목에서 만나겠지만 타고 내리는 통로는 분명히 다르다. 반미청년회 수장 ‘안희정’에서 재선 충남지사 ‘안희정’이 되기까지, 마음속 철조망을 걷어내느라 수천 수만번 찔리고 다쳤을 것이다. 현실 정치로 나왔다면, 안희정 현상을 입증하려면 숱한 생채기가 벗겨지고 새살이 돋는 동안 ‘내가 품었던 세상의 욕망’을 성찰만 하지 말고 뚜렷하게 보여달라. 지난 계절을 ‘불만의 겨울’(1970년대 말 영국 노동당 집권 후 대규모 공공노조 파업)로 기억하는 봄을 맞고 싶진 않다.

정치부 구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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