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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가 되면 정월 초하루를 설날이라고 했다. 새해 첫 달을 1월이라 하지 않고 ‘정월(正月)’이라고 하면서 바르게 살기를 다짐했다. 그런데 조선시대 말에 일본 세력이 들어오면서 갑오년(1894년)에 억지로 변혁하기 시작하여 1896년부터 양력을 채용하게 됐고, 1895년 11월17일을 개국 505년 1월1일로 했다. 그리고 양력 1월1일을 설날이라고 지키라고 하였으나 백성들은 이 날을 ‘일본설’이라며 반발했고, 음력 정월 초하루에 설날제사를 지내며 우리 전통을 지킬 것을 다짐했다. 설날제사를 지내는 집안에서는 술을 담가 썼는데, 일제는 설날제사를 막으려고 술을 담가 먹는 것을 밀주라고 하면서 이것을 조사한다는 핑계로 음력설 쇠는 것과 설날제사를 단속했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키던 명절인 설날 즉, 정월 초하루를 ‘음력설’이라 하고 양력 1월1일을 ‘양력설’이라 하여 구별했다. 광복 후에는 양력설을 ‘신정’, 음력설을 ‘구정’이라는 되지 않는 말을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이중과세(二重過歲)라는 말이 나오고 이에 따른 폐단이 있다고 하여 한때는 양력설을 쇠도록 강요하면서, 그날만을 하루 공휴일로 지정하고 음력설에는 근무를 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음력설을 ‘민속의날’이라고 하여 하루 공휴일로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음력 정월 초하루를 ‘설날’ 명절로 정해 3일 공휴일로 하고 양력 1월1일은 하루 공휴일로 하면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새해가 되면 우리 선조들은 “과세(過歲) 편히 하였는가?” 하는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새해 인사 글귀로는 ‘기원성취(祈願成就)’를 써주거나 ‘새해에는 소원을 성취하시기 빕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이완용을 비롯한 부왜인들이 일본의 조선 총독이나 관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일본 풍습을 따라서 ‘근하신년(謹賀新年)’이라는 일본식 말을 써서 연하장이나 엽서를 보내었다. 부왜인은 일본제국에 빌붙어 이득을 보려던 무리들을 일컫는 말로서 일본과 평등하게 잘 지내자는 뜻의 친일파와는 다른 말이다. 근하신년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는 ‘삼가 새해를 축하한다’는 것인데 축하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용어이므로 새해에게 축하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런 일본풍이 지금도 전통인양 이어져 오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첫 절기 2월 초 입춘이 되면 입춘서, 입춘방이라고 하여 대문에 4자성어를 붙여 두는 관습이 내려왔다. 예전에는 입춘서에 ‘입춘대길’과 짝이 되는 글귀로 ‘소원성취’나 ‘만사형통’을 썼다. 그러나 요즘 보면 대문 양쪽에 입춘대길과 ‘건양다경(建陽多慶)’을 붙여 놓는다. 입춘대길은 ‘봄이 오면 좋은 일이 있다’는 말인데, 건양다경은 사전에도 없는 말로서 어디에서 온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고 쓰고 있다.

조선시대 일본의 힘이 들어와서 1894년 갑오억변이 있었다. 조정에서 일본의 간섭 아래 정치체제 변화를 위해 208건을 의결한 것이다. 이를 갑오경장이라 하는데 억지로 변혁되었으므로 억변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갑오억변 이후 1896년부터 음력 대신 양력을 쓰게 됐는데 ‘건양’이라는 연호를 1년 동안 사용하다가, 1897년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원구단에서 고종 임금이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했다. 그 이후에 건양다경이란 말이 나왔다. 이 말은 ‘양력을 쓰면 경사로운 일이 많다’는 뜻과 ‘건양 연호를 쓸 때 경사가 많았다’고 하는 뜻으로 부왜인들이 지어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건양 연호를 사용한 이후 나라는 개화되어 잘된 것이 아니라 쇠퇴의 길로 들어갔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유래도 잘 알지 못하고 나라 잃은 시절 사용하였던 근하신년이나 건양다경 같은 글귀를 버려야 한다. 그 대신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의 고유한 설날의 의미를 온전히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헌국 | 전 진주시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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