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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된 정의는 정의의 부정(‘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이나 마찬가지다. 정의를 찾는 길이 어렵고 시간이 걸리지만 너무 늦게 세워진 정의는 정의로서 인정받기 어렵다는 뜻이다. 헌법재판소의 조속한 탄핵심판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즐겨 인용하는 문구다. 이 말이 2016년 말 광장에서 자주 들리는 이유는 그만큼 정의를 갈구하는 시민의 목소리가 높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정의와 불공정, 불공평을 타파하길 원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돈도 실력이야.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는 철없는 코멘트가 태생적 경제신분이 평생 간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를 분노케 하더니, 그녀의 어머니 최순실이 숨겨놓은 자산이 최대 수조원에서 최소 몇 천억원이라는 보도는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분노할 힘조차 없이 좌절을 맛보게 한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자마자 계층 이동의 꿈을 접어야 하는 현실을 접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의 경제력을 넘어서기 힘든 현실을 맛봐야 하는 청년세대가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월급을 몽땅 모아도 10년 안에 집 한 채 사기 어려운 대한민국에서 최씨처럼 번듯한 직업도 없었던 사람이 엄청난 자산가가 될 수 있는 길은 부유한 부모로부터 물려받지 않았다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올해 추징금 미납액수가 24조원에 달하고 추징된 액수는 겨우 0.1%에 불과하다는 법무부 자료는 우리를 더욱 절망케 한다. 10억원 이상의 고액 미납자들 대다수는 고위공직자였거나 전직 최고경영자(CEO)라고 한다. 이들은 자기 재산은 없으나 여전히 호화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본인 지갑은 비었을지 몰라도 추징을 피하기 위하여 배우자나 자식에게 범죄행위로 얻은 재산을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부정부패한 재산을 추징하지 못하고 범죄자들이 그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사법정의는 미완성이다. 미완성인 사법정의는 더 이상 정의가 아니다. 지갑에 29만원밖에 없다는 전직 대통령, 수십조원대의 추징금에도 배우자나 자식들에게 넘겨진 재산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전직 기업 총수를 보며 분노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돈 없는 서민은 벌금을 못 내면 내야 할 벌금을 일당 10만원으로 나누어 그 일수에 해당하는 만큼 노역장에 유치되는데 기업인들은 일당을 수천만원 혹은 억대로 쳐줘 며칠만 살고 나오는 황제노역의 현실은 부정의한 사법제도 운영의 민낯이다.
범죄자에게 그의 불법행위에 상응하는 형벌을 내려도 범죄행위로 얻은 수익을 환수하지 못하면 정의롭지 못하다. 범죄자로 하여금 부정한 이익을 보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범죄자를 형사 처벌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징역을 살게 해도 복역 후 숨겨놓은 범죄수익으로 잘 살아간다면 과연 사법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미완성이거나 지연된 정의가 아니라 온전한 사법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범죄수익의 환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범죄수익이라면 범죄자의 소유이거나, 그로부터 범죄수익인 줄 알고 받았다는 것이 확인되는 한 환수돼야 한다.
특별검사의 수사가 탄력을 받고 구체적인 범죄사실과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범죄자들의 형사처벌을 전제로 그들이 국가권력을 사유화해 축적한 불법적인 재산의 환수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박영수 특검은 최씨 일가의 재산 형성 과정 추적을 위해 별도 전담팀을 꾸렸다. 정치권에서도 부정축적 재산을 환수하기 위한 특별법 및 관련법 개정안 발의가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최씨 일가는 물론 박 대통령 재산까지 추적하여 부정축적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국민의당도 ‘최순실법 패키지’를 발의했다. ‘민주헌정침해행위자의 부정축적 재산 환수에 관한 특별법안’도 포함되어 있다. 형사처벌을 전제로 하지 않는 민사몰수제도의 도입 논의도 활발하다.
국정조사나 특검수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국정농단을 주도한 비선 실세들이 그동안 불법적으로 획득한 재산을 샅샅이 추적하여 국고로 환수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범죄수익의 환수는 우리 사회에 법과 정의가 살아 있고 법치국가원리가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본지표이기 때문이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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