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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 일제하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육탄3용사(肉彈三勇士)’의 영웅담이 게재돼 있었다. 육탄으로 적의 전차를 파괴하고 장렬히 목숨을 던졌다는 내용이다. 당시의 청소년들은 그 글을 읽고 감동한 나머지 혈서까지 쓰며 그들의 천황(天皇)에 충성을 다짐했다. 일본의 패전 후 그 글 내용이 조작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우리 육군에서도 육탄10용사니, 육탄5용사니 하며 일본군의 육탄3용사와 비슷한 영웅담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사실은 조작되거나 과장된 이야기였을 뿐이다. 그런 가짜 소동은 주로 일본군 출신 지휘관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부하의 죽음을 자신의 공적으로 미화하기 위한 얄팍한 속셈이 깔려 있었다.

그 가짜 소동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1981년 초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으로 있을 때 희한한 진정서를 받고 그 사연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6·25전쟁 당시 심일 소령이 인민군의 전차를 육탄으로 파괴하여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됐는데 가짜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당시 육군의 당연직 공적심사위원장이었기 때문에 즉시 조사에 착수하였다. 당시는 관련자가 생존해 있었기에 반론의 여지 없이 가짜로 확인이 끝났다.

1981년 초라면 어수선할 때였다. 전두환 정권 출범 초기라 광주 문제 등으로 육군본부는 경황이 없었다. 나는 정식 과정을 밟아 보고했지만 상부는 관심 밖이었다. 전역 후 나는 군사평론가협회와 한국군사학회를 창립하면서 전쟁기념관 4층에 사무실을 냈다. 이 무렵 도미유학 동기인 손모 예비역 소장이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의 말인 즉 ‘월남전 영웅으로 강재구 소령이 있는데 6·25전쟁 영웅이 없으니 함께 신화를 창조하자’는 것이었다. 바로 태극무공훈장 수훈자인 심일 소령을 호국영웅으로 추대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단칼로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내 사무실 건너편 백선엽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실로 나를 끌다시피 데리고 갔다. 백선엽 예비역 장군은 반갑게 나를 맞았으나 그의 입에서 ‘손 장군과 함께 6·25전쟁 호국영웅을 만들어달라’는 말이 떨어지자 ‘본인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방을 나왔다.

그로부터 3년 후 육사에는 심일 동상이 세워지고 심일상이 제정되었다. 나는 깜짝 놀라 손 장군에게 어찌된 경우인가 문의하니 ‘백선엽 장군이 육군에 압력을 넣어 해결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육군본부는 심일상을 제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정책회의조차 열지 않고 밀실에서 작업을 했다는 사실이 최근 확인됐다. 이대용 전 주월공사가 지난해 6월 심일 소령의 공적이 허위라고 다시 밝혔는데도, 자문위원장인 백선엽 장군을 업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진실을 외면했다. 군사편찬연구소는 박근혜 정부에서 국방장관의 이름을 앞세우고 심일 소령 호국영웅 정착화 ‘알박기’에 광분하며 육군에 계속 압력을 넣었다. 그러면서 국방부가 만든 심일소령공적확인위원회는 36년 전에 심일 소령 공적 내용을 먼저 확인한 공적심사위원장이었던 나에게 사실 여부를 문의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정황을 확인하고 진실을 밝혀내려 홀로 국방부의 압력을 막고 불의와 싸우는 현대판 ‘조선명사관(朝鮮名史官)’이 육군군사연구소장 한설 장군이다. 역사학 박사인 그는 국방부로부터 ‘심일 소령의 전과는 사실’이라고 발표할 것을 지시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심일 소령의 공적이 허위라고 반박했다. 나는 군 후배지만 한설 장군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새 정부는 심일 소령의 허위 공적뿐만 아니라 가짜 호국영웅으로 만들어진 배경과 과정에 대한 진상조사도 해야 한다. 결론이 뒤집힐까 우려해 박근혜 정부가 끝나기 전에 심일 소령의 전과가 사실이라고 ‘알박기’했던 국방부 정책부서 장군들과 실무자들이 지금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은 부담일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박경석 | 한국군사학회 명예회장·군사평론가협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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