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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를 함락하고 왕과 태자를 사로잡았다. 후대의 사가들은 이를 백제의 멸망으로 기록했으나, 당대 백제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 지도자를 옹립하고 왜의 지원군까지 끌어들여 자기 땅에서 신라와 당나라군을 몰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이 싸움은 4년 뒤에야 끝났다.

서기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고구려를 남북에서 협공하여 평양성을 함락하고 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후대의 사가들은 이 역시도 고구려의 멸망으로 기록했으나, 당대 고구려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새 지도자를 옹립하고 자기들 땅을 되찾기 위해 싸웠다. 이번에는 신라가 고구려인들을 지원했다. 고구려인들의 싸움도 5년간 지속되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서기 675년, 신라는 마침내 백제와 고구려 땅 일부에서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불완전하나마 ‘삼국통일’을 이뤄냈다. 그런데 정말 ‘통일’이 되었던 것일까?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자기 땅으로 삼은 것은 확실하지만, 그 백성들까지 온전히 자기 백성으로 만들었던 것일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225년 뒤인 서기 900년, 옛 백제 땅에서 세력을 키워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견훤은 나라 이름을 후백제로 정했다. 그가 백제의 옛 왕실과 혈연관계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백제의 부활을 내세우는 것이, 그 땅에 사는 다른 호족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서기 901년, 옛 고구려 땅 일부를 차지한 궁예도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하고 고구려를 위한 복수를 다짐했다. 그에게는 신라 귀족의 후예라는 자신의 혈통보다도,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200년 넘게 지녀 온 ‘복수심’이 정치적으로 훨씬 더 중요했다.

궁예의 고려는 마진, 태봉으로 이름을 바꿨으나 궁예를 몰아내고 새 왕이 된 왕건은 나라 이름을 고려로 되돌렸다. 이어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다시 ‘통일’을 이루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한 셈일까?

1190년 옛 신라의 수도였던 동경(현재의 경주) 일대에서 백성들이 봉기했다. 이들은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모두 신라를 다시 세우겠다고 공언했다. 1217년에 서경(현재의 평양)에서 병졸들의 반란을 주도한 최광수는 ‘고구려부흥병마사’를 자처했다. 1236년 옛 백제 땅에 살던 이연년 형제는 금성산성에서 병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자칭 ‘백제도원수’라 했다. 고구려 백제가 망한 지 600년, 신라가 망한 지 300년이 지났어도,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이라는 자의식은 소멸하지 않았다.

<삼국사기>(1145)에 없던 단군 관련 기록이 <삼국유사>(1281)에 나타난 것도, 이성계가 새 왕조 이름을 단군이 건국했던 나라 이름으로 정한 것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언어와 풍습이 판이한 몽골인들의 침략을 겪고 나서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민(遺民)이라는 의식을 청산하고 비로소 한 무리가 될 수 있었다. 백성들의 통일은, ‘삼국통일’ 700년 뒤에야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반란이 있었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를 재건하겠다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내년은 남북이 분단된 지 70년째 되는 해이다. 혈연이라는 질긴 끈으로 이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는 이산가족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평양 출신 학생과 대구 출신 학생이 한 교실에서 공부하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질러 프랑스 파리에 가던 현실이 ‘꾸지도 않는 꿈’이 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남북 문화의 이질화를 걱정하고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인데, 지금은 그런 목소리조차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통일을 원치 않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져도, 그 경로가 아무리 복잡해도, 같은 언어를 쓰면서 서로를 ‘동포’라 불러온 역사의 힘은 우리를 통일로 밀어붙일 것이다.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났다. 현대에 세습 독재 권력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건 인류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그런데 북한 체제가 붕괴한다고 해서, 북한 땅이 대한민국 영토로 통합된다고 해서, 그걸 ‘민족통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남북한 주민들 사이의 문화적 ‘이질화’를 걱정하던 단계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지금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그 ‘이질성’을 수용하고 그와 공존하는 방식이다. 북한에서 탈출해 남한에 정착한 사람이 3만명을 넘어섰다. 그런데 남한 사회는 이들을 어떻게 ‘통합’하고 있는가?

저들 중 북한으로 되돌아간 사람이 확인된 수만 스물다섯이라고 한다. 목숨을 걸고 탈북하여 천신만고 끝에 남한에 정착했다가 되돌아간 이유를 다 알 수야 없지만, 저들이 결국 남한 사회에 ‘통합’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가 그들을 대하는 일반적 태도는 호기심과 동정심과 멸시감이 뒤섞인 것으로서, 중국 조선족이나 동남아시아 이주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와 그리 다르지 않다.

자진해서 ‘통합’되기를 원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이런 상태인데, 만약 ‘도둑처럼’ 통일이 다가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평화통일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결코 평화로운 나라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탈북자들을 우리 사회의 동등한 일원으로 재배치하는 일은 북한 정권의 반복적인 무력시위에 대응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탈북자들을 우리 사회에 적응시키는 문제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탈북자들에게 적응하는 문제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만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하루라도 일찍 분단시대를 끝낼 수 있다.

전우용 | 대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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