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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2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김규항의 글, ‘더러운 여자는 없다’는 내용 면에서 오류투성이다. 배봉기 피해자와 기지촌 여성들의 소송을 예로 들면서 남성중심적 민족주의, 가부장적 순결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가 싶더니, 뜬금없이 박유하의 글 중 일부를 떼어 인용하고는 책 선전으로 마무리한다.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민족주의와 젠더에 관한 수많은 페미니스트 저작들에 무지하거나, 박유하를 옹호한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알리바이이거나. 심지어 비난을 피하기 위해 불특정 다수를 지칭하는 ‘우리’라는 장치를 글 곳곳에 깔아 두었다. 비겁하다.

할 말이 많으나 지면이 한정돼 몇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자. 첫째,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배경에는 여성운동의 역사가 있다. 사라진 동년배들의 보이지 않는 울음소리에 공명한 윤정옥 선생님의 고투와 이를 식민지와 분단국가, 여성 문제로 외연화하고자 한 이효재 선생님의 지원, 유신시절부터 기생관광 및 성매매 문제와 싸워 온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노력이 뒷받침돼 마침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결성됐다.

둘째, 그러기에 배봉기씨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공명되지 않은 이유는 ‘순결한 조선처녀라는 위안부상’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들을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갖춘 ‘우리’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은 한동안 정조에 관한 죄였으며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낙인은 죽음을 불사할 정도였다. 김학순씨의 용감한 공개증언 이후에도 작은 사무실에 놓인 전화기에는 당사자를 모욕하고 활동가를 협박하는 한국 남자들의 목소리로 넘쳐났었다. ‘우리’의 굴절된 인식은 끈질긴 여성운동과 1994년에서야 제정된 성폭력특별법으로 조금씩 교정되기 시작했다.



셋째, 경험은 자명한 것이 아니다. 주체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구성된다. 그러기에 경험을 다르게 의미화할 수 있는 ‘우리’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다. 그간 많은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은 식민지 조선이나 개발독재시대 여성들이 ‘위안부’가 되어야만 했던 조건에 주목하고, 그들의 다양한 삶의 경험을 새롭게 해석해 대항적 역사담론으로 끌어올리고자 노력하면서, ‘우리’를 해체하고 재구성하고자 했다.

넷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기지촌 여성인권 단체들의 연대체인 기지촌인권연대(2012년)가 만들어지자, 피해 당사자들이 두 손 마주 잡고 만나는 역사가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당신들 잘못이 아니다, 국가의 책임이다”라며 기지촌 할머니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들 간 상호 공감과 지지가 없었다면, ‘양갈보’라 손가락질 받던 이들이 공적 공간에 얼굴을 드러내고 수요시위 등에 참석해 연대발언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다섯째, 그러므로 ‘미군 위안부’들의 소송은 당사자가 사회적 편견과 맞서 싸우기 시작한 용감한 첫걸음이자,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아스팔트길에 서서 사실 인정과 법적 배상을 외치며 찾고자 했던 역사적 정의와 맞닿아 있다. 사회적 유령에서 피해자이자 생존자로, 마침내 남성중심적 역사에 도전하는 증인이자 운동가로 스스로를 정체화해 왔던 여성들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이들의 힘겨운 투쟁을 통해 무지하고 비열하며, 비굴했던 ‘우리’는 비로소 그 ‘싸구려 정의’감이나마 가지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차가운 겨울날 1시간만 수요시위에 참가해 보시라. 그게 어렵다면 조용한 낮, 소녀상 옆자리 빈 의자에 가만히 앉아 보시라. 두 손 불끈 쥐고 발꿈치를 땅에 닫지 못한 소녀의 뒤에, 가슴에 희망 나비 한 마리 품고 스러져가는 할머니 그림자를 응시해 보시라. 식민지 위안소의 생존자가 할머니가 되어서야, 아니 죽어서야 비로소 최소한의 공감능력을 가진 청중을 만난 심정을 느껴 보시라. 만일 울림이 있어, 단단한 가슴을 싸고 있는 껍질이 소리 내어 깨지는 순간이 오면, 터져 나오는 울음에 오장육부를 마음껏 적셔 보시라. 책상에 앉아 손가락으로 익힌 ‘우리’의 재주가 얼마나 얄팍한 것이며 기만적인 것인지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필자는 미군 기지촌, 일본군 ‘위안부’, 반(反)성매매 관련 활동가이자 연구자이다. 김규항씨가 피상적으로 접했을 ‘미군 위안부’의 국가대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후원자이자 법정 증인이기도 하다.


이나영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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