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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고3이 되었으니 앞으로 EBS 교재로 수업할게요.” “선생님, 그럼 이미 구입한 교과서는 수업 때 사용 안 하나요?”
매년 새 학기 교사와 학생들이 보는 고3 교실의 첫 수업 풍경이다. 십수년째 한결같은 이 장면은, 고3 교과서의 구입으로 인해 학부모들이 내지 않아도 될 돈이 낭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년 내내 5지선다형의 객관식 풀이만 하는 파행적 고3 수업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서 이를 불편한 진실이라 말하기도 민망하다. 다양한 교육자료를 토대로 한 창의적 수업은 고사하고, 그래도 여러 필진이 지혜를 모아 만든 한 권의 교과서로 내실 있는 수업을 구축하기만 해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문제풀이 위주인 EBS 교재의 수능연계율이 70%인 까닭에,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과서 대신 EBS 교재를 주교재로 활용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학생들로 하여금 교과서를 구매하지 않도록 하면 될 것 같은데, 여기에 좀 더 복잡한 맥락이 있다.
지금 고2 학생들은 내년 초부터 사용할 교과서를 구입 신청하고 있다. 교사 대부분은 내년 수업 때 이 교과서보다 EBS 교재가 더 많이 사용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학생들에게 사지 말라고 선뜻 말하기 어렵다. 내년에 어떤 교사가 고3을 담당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내년에 교과서로 수업할 확률(?)은 낮지만, 공부할 때 참고가 될 수 있으므로 가급적 교과서는 구매하는 것이 좋겠다’는 원론적 이야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선생님의 ‘모호한’ 안내를 받은 고2 학생들은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구매를 한다. 올해 필자의 학교에서 고3 학생들이 1인당 평균 7만원가량의 교과서를 구입했다. 이에 전국 고3 학생들의 숫자를 40만명으로, 학생 1인당 교과서 구매비용을 5만원으로 낮춰 잡아도 약 200억원에 해당하는 비용이 든다. 학습에 효율적으로 사용된 교과서도 있을 것이므로, 이 중 절반을 제외해도 약 100억원의 학부모 부담 교육경비는 버려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 치열해진 입시경쟁에서 사교육에 들어가는 천문학적 비용을 생각하면 오히려 왜소한 액수라고 치부될 수도 있겠다. 또 궁극적으로 입시경쟁을 완화하고, 대학평준화 등을 통해 학벌사회를 타파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상적 목표만을 현실 저 너머에 둔 채, 언제까지나 현상에 대해 모른 척해서도 안될 일이다. 현시점에서 학생들의 비효율적인 학습과정 및 학부모들의 불필요한 교육비 부담을 개선할 대증적 방책조차 제시하지 못하고 책임을 피하려고만 하는 교육계의 모습이 안타깝다.
1년 뒤 수능개편안이 발표되면 그에 따라 합리적인 교과서 관련 정책도 뒤따를 것이라 기대할 수밖에 없다. 마침 문재인 정부는 2019년부터 단계적으로 고교 무상교육을 실시한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다만 재원 마련 방안을 고심 중일 텐데, 앞서 살펴본 고3 교과서의 비효율적 지출 상황도 그대로 국가가 떠안게 된다. 따라서 관련 실태조사 등을 통해 비용 절감 방안을 모색함은 물론 궁극적으로 교과서를 토대로 온전히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섬세한 교육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학부모가 안심하고, 아이들이 더 행복한 학교교육을 만드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교육당국이 보여주길 바란다.
<이광국 | 전교조 인천지부 정책연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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