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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갑자기 대리수업을 맡았다. 이 시간은 우리 주변의 일반상식 중에서 모르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을 받는 수업으로 대신한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손을 든 학생이 “선생님, ‘활강’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칠판에 ‘활강’이라고 썼지만 ‘모르는 게 없는’ 그 선생님도 제대로 답변을 못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학생이 겨울철 스키종목의 하나인 ‘활강 경기(滑降 競技)’를 어디서 읽었거나 들었지 싶다. 1960년대 초,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의 추억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딸네 집으로 가서 ‘또래와는 많이 다른’ 아홉 살 손자를 데리고 단풍이 한창인 동네 산과 수변공원을 거닐었다. 한강으로 흐르는 하천가에는 정성들여 가꾼 국화 화분이 곳곳마다 놓여 있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공사 중인 장비에서 나는 엔진 소리가 요란했다. 플래카드와 입간판에는 “○○천 차집관거(우안) 보수공사입니다. 불편하신 사항은 연락바랍니다….” 무슨 공사를 하는지 인부에게 물었다. 하수관 청소를 하는데 ‘우안’은 영 모르는 표정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아 국어사전을 찾았다. 차집관거(遮集管渠)는 “하수나 빗물을 모아서 하수처리장으로 수송하기 위해 설치한 관이나 통로”, 우안(右岸)은 “강의 하류를 향하고 볼 때, 오른쪽 강변을 이르는 말”이었다. 괄호 안 한자를 보니 겨우 알 듯 말 듯하다. 하천 오른쪽 땅속에 묻힌 하수관에 공기를 주입시켜 대청소를 하는 공사인 것 같은데 안내문은 이렇듯 난해했다.

몇 달 전 언론 매체와 인터넷에 ‘오량가구’라는 단어가 오르내렸다. 그 무렵 어느 신문의 기사이다. 국무회의 때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에 있는 ‘침류각(枕流閣)’ 안내판을 찍은 사진을 들고 직접 읽으면서 “이것이 공공 언어의 한 유형인데, ‘세벌대 기단, 굴도리집, 겹처마, 팔작지붕, 오량가구, 불발기를 두고 있고 상하에 띠살, 교살, 딱지소, 굴도리…’ 혹시 도종환 장관은 뜻을 한 번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어 대통령은 “오량가구, 그것이 ‘5개가 있는 구조’라든지 이런 것이 전통가옥 연구자들에게는 관심일지 몰라도 일반 국민에게는 무슨 관심이겠나”라며 “제가 느끼는 궁금증은 ‘이게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을까, 언제, 왜 이게 청와대 안에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등인데 그런 의문에 대해서는 안내판에 한마디도 없다”고 지적했다. 침류각은 1900년대 초 전통가옥으로 서울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고 신문기사는 덧붙였다.

‘공공 언어’는 사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 말 그대로 공공의 영역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공무원이 작성하는 공문서에서부터 법률, 보도자료, 정책명, 문화재 안내판, 지하철 안내문 등에 쓰인 언어가 모두 공공 언어라 할 수 있다. 공공 언어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있었고, 국립국어원에서는 국어 정책 수립은 물론 국어의 정비, 국어 사용 개선, 국민의 국어 능력 향상 등에 노력하고 있다. 또한 ‘국어기본법’에 따라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국어 발전과 보전을 위한 업무를 하도록 ‘국어책임관’을 지정하고 있다. 국민들의 국어 능력을 높이고 국어 관련 상담 등을 수행하기 위해 국어 전문 인력과 시설을 갖춘 ‘국어문화원’이 지정되어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매년 연수회를 갖기도 한다.

그런데도 건축·토목, 의료 분야 등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써 온 용어를 지금도 예사롭게 사용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해마다 ‘국어 순화용어’를 발표, 장려하지만 쏟아져 들어오는 외래어, 요상한 신조어나 이모티콘, 억지로 만든 약어 등에 눌려 빛이 바래고 있다. 공공 영역에서 작성되는 글의 가장 큰 특징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의무교육을 받은 일반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알기 쉽고, 올바른 언어로 작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글을 이해한 국민과 그러지 못한 국민 사이가 불평등하게 된다. 청소년만이, 군인들만이, 의사만이 이해할 수 있는 끼리끼리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또 다른 차별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 공공기관, 언론 등에서 ‘쉽고, 바른 공공 언어’ 사용에 앞장서야 하는 이유이다.

요즘 부쩍 학생 질문에 답변 못한 대리 수업을 맡았던 그 선생님이 생각난다.

<노청한 사회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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