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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공직자들이 자신의 자서전에 비밀기록을 쓰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외교 및 안보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일이다.

그중 압권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퇴임 당시 고위 공직자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비밀기록을 청와대에 단 한 건도 남기지 않고, 비밀기록 전체를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묶어 이관했다.

비밀기록을 대통령지정기록물로 지정하여, 그 기록은 이명박 전 대통령만 볼 수가 있다.

그런데 퇴임 2년 후 이 전 대통령은 자서전을 통해, 수많은 비밀기록을 폭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통령 재직 시 중국 원자바오 총리와 나눴던 대화, 북한 밀사와 나눴던 대화 등 내밀한 비밀기록을 공개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그 때문인지 책은 지금까지도 잘 팔리고 있다.

참여정부 외교안보 정책에 관여한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최근 펴낸 '빙하는 움직인다'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2007년 11월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 앞서 노 전 대통령 주재로 열린 수뇌부 회의에서 남북 채널을 통해 북한의 의견을 물어보자는 김만복 당시 국가정보원장의 견해를 문재인 당시 실장이 수용했으며, 결국 우리 정부는 북한의 뜻을 존중해 기권했다"고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2007년 3월 청와대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대화를 나누는 당시 문재인 비서실장과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 연합뉴스

유사한 사례는 반복되었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2015년 10월 출판 기념 기자회견에서 남북이 핫라인으로 수시로 직접 통화했다고 국가비밀을 누설했다.

국정원은 이례적으로 서울중앙지법에 이 책에 대한 판매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고, 검찰에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하지만 국정원도 1급 비밀이던 2차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폭로하는 데 앞장섰다. 전 세계 정보기관 중 최초일 것이다.

최근 송민순 전 장관이 회고록을 통해 2007년 당시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이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을 앞두고 북한의 의견을 물었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어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비밀 누설의 당사자였던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송민순 전 장관에 대해 비밀 누설이라고 지적했다는 점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 현실이다.

시민들은 이런 사태를 어떻게 봐야 할까? 시민의 ‘알 권리’는 정보공개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정부가 비밀·비공개 기록을 잘 관리하는 것도 포함한다. 특히 보안업무규정에서 정의하고 있는 비밀기록은 누설될 경우 대한민국과 외교관계가 단절되고 전쟁을 일으키며, 국가의 방위계획을 위태롭게 하는 것들이다. 이런 이유로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에게 재직 및 퇴직 후에도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지키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전직 공직자들의 비밀 누설 행위를 비판해야 할 정치권이 오히려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생각해보라. 비밀 누설을 위법행위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논쟁으로 확산시키고 그 결과 자신의 위상이 커지니 비밀을 누설하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중대한 국가 문제를 다뤘으니 기록이 없다면 문제이고, 있다면 봐야 한다’면서 대통령지정기록물 열람을 주장했다.

전·현직 공직자들이 비밀기록을 폭로하고, 이로 인해 정치적 논쟁이 발생하면 대통령지정기록물을 열람하자는 패턴이 지난 몇 년간 반복돼왔다. 아마 이번 건도 시민단체의 고발이 있었으니, 검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통령지정기록물에 대한 영장을 검토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관련 기록이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겨 놓은 대통령기록물을 사회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개탄스럽다. 대통령기록물은 역사적 평가를 위해 보존하는 것이지, 이런 정치적 공방에 고인의 정신을 훼손하라고 남겨둔 것이 아니다. 전·현직 공직자들이 자서전을 통해 비밀을 누설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공직자들은 자서전을 집필할 때 관련 국가기관에 세심한 법률적 검토를 받아야 한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회고록 사태는 이런 절차들을 생략해 발생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자서전이나 회고록에 정치적 목적을 위해 비밀기록을 양념처럼 섞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자서전 등을 통한 무책임한 폭로와 정국전환, 대통령지정기록물 열람 논쟁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반복되는 명예훼손. 고인은 말이 없어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전·현직 고위 공직자들의 이런 일탈 행위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낭떠러지로 밀어낸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전진한 ‘바꿈’ 상임이사 알권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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