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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칙이 개정됐다. 난데없이 3년 이내 개인전 수상자에 한해 인정되던 체육특기자 조건이 단체전 수상자까지 포함됐다. 출석을 하지 않아서 학사경고를 받았다. 다음 학기에는 휴학계를 제출했다. 누군가 학과장 등을 만난 뒤 지도교수가 바뀌고 학사경고를 면하게 됐다. 비속어와 은어까지 표절한 리포트는 B학점이 나왔다.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 이대 입학과 전후 사정 이야기이다.

그녀는 지금 독일에서 20여개의 방이 딸린 호텔을 통째로 빌려서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 통역, 운전, 말 관리를 돕는 10여 명의 인력이 정씨의 시중을 들고 있단다. 이런 소식을 듣고 있자니 의정부 화재로 아들을 살리고 목숨을 잃은 한 미혼모가 떠올랐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지난 17일 서울 이화여대 정문 앞에서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의 입시·학사 특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정씨가 2014년 12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 서성일 기자

지난해 5월 의정부 화재로 사망한 미혼모 나미경씨의 사연은 기구했다. 그녀는 전신화상을 입고 치료를 받다가 의식을 잃은 채 사흘 만에 사망했다. 그녀는 아들을 감싸 안고 온몸으로 화마를 막으며 현장을 빠져나와 쓰러졌다. 낙태 권유를 거절하고 어렵게 얻은 유일한 피붙이만은 살리기 위해서였다. 고아, 입양, 파양을 거치고 결국 사귀던 남자에게 버림받았다.

그녀는 마트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아들과 행복하게 살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화마로 그녀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유독 그녀에게 삶은 잔혹했다. 관리비를 제때에 못내 몇 번이나 전기를 끊겨 어둠 속에서 어린 아들을 부둥켜안고 밤을 지새워야 했다. 가장 찬란하게 빛났어야 할 5월, 그녀의 청춘은 가장 어둡고 힘겨웠다. 아들을 살렸지만 그녀는 결국 생을 마감했다. 그녀 나이 22세였다.

비슷한 나이에 같은 하늘에서 아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정유라씨는 “돈도 능력”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녀와 같은 대학을 다니는 이대생들은 돈은 그렇다 쳐도 몰상식이 판치는 현실을 더 이상 두고 보지 않았다.

정씨의 황당한 학사관리를 지켜본 한 이대생은 참다못해 대자보에 “권력자 밑에 붙어 비리에 동조하는 당신들이 교육자인가? 사퇴하지 않으면 멸시와 망신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참았던 분노를 터트렸다.

그녀를 비롯한 이대생들은 권력과 돈만 있으면 학점과 성적까지 조작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130년이 된 대학의 학칙까지 변경하면서 불가능한 입학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에 분노했다. 밤을 새우고 코피까지 흘리면서 공부했다. 마감 날짜에 맞춰 수많은 시간을 공들인 과제를 제출했다. 그런데 수업에 출석도 하지 않고, 부실한 과제를 마감 시한이 지나 제출한 최씨의 딸보다 못한 학점을 받게 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어찌 분노하지 않겠는가. 애초부터 공정한 경쟁 같은 게 없었다. 필자는 이번에 ‘흙수저’와 ‘헬조선’의 실체를 똑똑히 보았다. 예전에는 마음 한쪽에서는 요즘 학생들의 유약함을 비난했다. 노력해 보지도 않고, 흙수저니 헬조선이니 비관적 사고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은 비겁한 일 아니냐고.

하지만 최씨가 벌인 일들을 보면서 필자는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행태에 절망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흙수저가 금수저가 되지 않는 현실을 직시했다. 입학이 불가능한 대학의 학칙까지 바꿔서 딸을 입학시키는 권력이라는 ‘황금수저’가 있는데, 어떻게 경쟁이 되겠는가.

우리 사회 어딘가에는 유기견처럼 양부모나 남자친구에게 버려진 20대 미혼모, 제2의 나미경씨가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쪽에서 “돈도 실력”이고 “부모도 실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돈과 권력으로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한다. 그게 도리다.

다시 말하지만, 한쪽에서는 열심히, 죽을힘을 다해 살아도 개·돼지 취급받으며,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권력을 배경으로 호가호위하며 온갖 비리를 저지르면서도 일말의 가책도 없이 호화 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것도 법 위에 군림하면서. 흙수저, 금수저, 헬조선, 개·돼지 국민이라는 말들이 괜히 회자되는 게 아니었다.

최희원 소설가·‘해커묵시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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