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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27일 교육부는 역사과 교육과정 개정안을 확정해 고시했다. 이번 개정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국정 역사교과서 폐지가 확정됨에 따라 새로운 교과서를 집필하기 위해 교육부가 내놓은 후속조치였다. 그런데 이 고시가 발표되기 하루 전인 7월26일 교육부 교육과정심의회 역사과위원회 명의의 긴급 성명서가 나왔다. 교육과정심의회 역사과위원회는 대통령령 제26844호에 의거해 설치된 교과별위원회로서 역사과 교육과정에 대한 실질적인 최종 심의기구이다. 성명서는 7월23일 언론을 통해 보도된 교육부가 고시하고자 한 역사과 교육과정 내용이 역사과위원회의 심의를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수정된 점을 문제 삼았다.

교육부가 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수정한 부분은 ‘민주주의’라는 역사 용어였다. 이것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수정한 것이다. 이 용어는 교육과정평가원이 교육과정 시안을 마련하고 교육과정심의회 역사과위원회가 심의하면서 단 한 번도 문제가 된 바 없었다. 오히려 역사과위원회는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세계사부터 한국사까지 넓고 깊은 역사 이야기를 쉽고 간결하게 담기 위해 더 많이 논의했다. 또한 지난 박근혜 정부가 법정고시 기간 1년6개월을 지키지 않고 1년으로 단축하며 국정 역사교과서를 강행했던 절차적 불법행위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 휴일에도 심의 회의를 할 정도로 교육부의 절차를 도왔다.

교육부의 보도자료에 대해 역사과위원회가 성명서로 비판하자, 교육부도 심의 절차에 문제가 있었음을 사과하며 해명에 나섰다. 절차를 무시하고 역사교육을 정치 도구화했던 2011년 자유민주주의 파동, 2015년 개정교육과정 강행과정에서 보여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적폐를 그대로 재현해 놓고 용서를 구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한편으로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교육부는 태연히 7월27일 법정고시를 강행했다.

법정고시 이후 교육부는 더욱 적극적으로 해명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런 사태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 나중에 설명해서 넘어가면 된다는 식이었다. 교육부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교육과정심의회 역사과위원장 사퇴 의사를 전달했다. 합법을 위장한 불법의 타성에 젖어 있는 교육부에 대한 경고였다. 그러자 교육부는 교육과정정책관이 직접 학교로 찾아오고, 차관, 나중에는 장관과의 면담 자리를 마련한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면담 자리에 가서 해명을 듣는 것으로 이 사태가 끝난다고 봤는가. 이때 오버랩되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교육부에 대한 역사국정교과서진상조사위원회가 진상조사 결과 교육부 관계자의 위법행위를 제기하자, 교육부는 위원들에게 해명하는 것으로 결국 자기 식구들 감싸기로 끝낸 사건이다. 대한민국 공무원들은 국민들에게는 절차, 법을 혹독히 들이대면서 자신들의 불법에는 왜 그리도 무감각할까.

촛불시민혁명 이후 전 세계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놀라움을 표현했다. 그것은 묵묵히 절차를 밟아 민주주의를 실천한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존경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의 공무원들은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미래세대를 위한 역사교육에서 민주주의적 절차를 지키지 않은 교육과정을 배우라고 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이런 식이라면 이후 역사교과서의 검정과정에서도 똑같은 일이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지원 | 전 교육과정심의회 역사과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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