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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물에 관리를 위한 번호를 부여한다는 것은 매우 비인간적이고 반문화적이다. 여기에다 관리상 부여한 번호가 마치 서열과 순위처럼 되어 등급 혹은 중요도가 결정되는 웃지 못할 현상들이 한국에서는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자의식이 형성되어 가는 학교 교육에서부터 관리번호에 의한 서열을 강요받는다. 학생들 관리를 위해 반 번호를 강요받고, 키순으로 관리번호를 부여받은 경험이 아직도 지배하고 있다. 또 우리나라 동 지명 중 무려 1~13동을 같은 동명으로 사용하는 곳도 있다. 이는 비문화성, 반역사성, 무다양성의 몰지각을 넘어 순위와 서열주의의 전형인 행정편의주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 문화재의 경우 세계에서 유일하게 북한과 같이 번호를 부여하고 있는데, 그 역사적 배경이 사뭇 치욕적이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문화재 개념을 도입하면서 일본에 있는 ‘국보’보다 아래 등급인 ‘보물’이라는 방식을 택했다.

여기에 두 주장이 있다. 하나는 총독부(서울)에서 가까운 건축, 회화 등의 순으로 남대문, 동대문이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도호쿠대학의 연구원인 오카 히데루가 2003년 <한국사론>에서 밝힌 내용을 보면, 제2대 조선총독으로 강압 통치를 시행한 것으로 악명 높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1904년 9월부터 1908년 11월까지 조선 군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숭례문 파괴를 시도했다. 하지만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두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각기 이들 문을 통해 도성에 입성해 한양을 함락시킨 자랑스러운 전승기념물이라 해서 보존됐고, 돈의문은 철거되는 비운을 맞았다는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1호 지정 촉구 국회 청원서를 제출한 혜문 대표, 이대로 회장, 노회찬 의원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_경향DB


이후 일제에 의해 숭례문은 ‘조선고적 1호’로 지정되었고, 해방 후 아무런 역사적 사실이나 문화재적 가치에 대한 조사나 연구 없이 일제 잔재를 그대로 계승하여 숭례문을 국보 1호, 흥인지문을 보물 1호로 지정하게 되었다. 평양의 경우 평양성의 현무문, 모란대, 을밀대 등은 모두 청일전쟁 때 일본군의 승리와 연관되는 전승기념물이라 해서 고적으로 지정돼 보호받았다.

결국 현재 우리나라의 문화재 체계인 국보와 보물의 등급과 번호는 일제 잔재 중에서 가장 천박한 서열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재에 등급과 번호 서열을 해방 71년이 지난 오늘날 폐지하기보다는 국보 1호를 훈민정음으로 교체해서 유지하자고 하는 것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제도에 우리 한글을 올려놓겠다는 것과 뭐가 다른가?

여기다 국보 1호를 숭례문에서 훈민정음으로 교체하자고 하면서, 급기야 20대 국회 제1호 입법청원을 하겠다고 한다. 단순 관리번호에 불과한 국보 1호에 대해 무슨 법적 근거로 입법청원을 한다는 것인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즉 법에 규정돼 있지도 않는 사실을 청원해서 1호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또다시 허상의 것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한국 사람들이 유달리 좋아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는 등급번호가 없다. 관리번호는 더더욱 없다. 우리에게 정신적·물질적 가치가 있는 상징물에 대해 번호를 매겨 마치 이것이 존재 이유인 듯하게 행정을 하면서 논란을 지속시킨 정부(문화재청)와 국회의 책임도 크다.

국보는 중요하고 보물은 그 다음 중요하고 근대문화재는 또 그 다음 중요하고 사적은 따로 중요하고 이렇게 해서 등급과 순위를 매기는 그 자체가 문화유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보와 보물에 부여하는 번호 제도는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50년 이상 번호를 부여했기 때문에 존치해야 한다는 명분은 냉정하지 못한 지나친 감성에 불과하다고 본다.

일부에서 안내판과 교과서 같은 간행물 수정 비용이 많이 소요된다고 너스레를 떠는데, 안내판 옆에 번호를 지우면 될 것이고, 교과서와 간행물은 매년 개정되거나 새로이 인쇄할 때 지우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열과 순위가 아니라, 문화유산을 같은 눈높이와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래야 불탄 숭례문의 비극도 없을 것이고, 서열주의를 강요하는 입법청원도 없을 것이다.



황평우 ㅣ 은평역사한옥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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